[리뷰] 남과 여 & A MAN AND A WOMAN
한국, 서울
Korea, Seoul
February 2016
감독/각본/연출: 이윤기
제작: 영화사봄
배우: 전도연, 공유, 박병은, 이미소, 박민지, 민무제, 이상희 등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사랑이였을까, 불안이였을까
"사랑해... 사랑해..."
상민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장면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어. 보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홍을 향한 목소리로 들렸지. 아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 순간에 터지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누군가 한 걸음 다가왔을 때, 결국 누군가는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었던 거야.
사실 그들이 처음에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들의 감정과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서로에게 끌리는 시점을 나로서는 찾지 못했지. 그들의 사랑을 이해해보려고 나는 스크린 속에 나오는 그들의 표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봤어.
그런데 어느 순간, 기홍의 행동과 표정을 보면서 알 수 있었어. 가족들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보여줘야 하는 그의 표정과 행동들은 아주 조심스럽고 조용하지. 그래서인지 그의 대사는 늘 애매모호해. 언제나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어느 중간 즈음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어. 그런데 그런 기홍이 상민의 앞에서는 한없이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줘. 상민이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기홍은 상민을 갖고 싶어 해. 자신을 좀 봐달라는 표정으로 상민을 감싸 안지. 그런 기홍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제야 기홍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힘들었는 지를 알 수 있었어. 자신의 삶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 그는 참 힘들었구나, 하고 말이야. 그에게도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내와 마음이 아픈 딸의 곁에서, 기홍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견디는 것뿐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기홍이 보이기 시작하자, 상민의 삶도 보이기 시작했어. 상민의 삶도 참 고단해 보였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 아이를 사랑하니까, 나의 아이니까, 아이가 아파서 하는 행동들이니까, 나는 이 아이의 엄마니까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 그래서 더 불안해 보였어.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삶은, 결코 괜찮지 않은 삶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하루라도 보살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캠프를 떠나게 되면서 비로소 알게 돼. 자신이 없어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야. 늘 붙잡고 살았던 그 마음을 놓았을 때, 때마침 기홍이 그녀 옆에 있었어. 그녀처럼 아주 고단한 삶을 살아왔을 한 남자,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지만 자신처럼 괜찮지 않은 한 사람.
그래서였을 거야. 서로의 고단함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처럼 상대방도 도망치고 싶을 거라는 걸 느꼈던 거지. 그들은 서로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았던 거야. 놓고 싶었던 그 마음을, 늘 따라다니는 무거운 책임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그걸 던져 버려도 책망하거나 질타하지 않을 존재가 서로 되어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달려가. 때로는 그만하자는 말속에, 보고 싶다, 사랑한다, 라는 말들을 숨겨 가면서 말이야.
감독은 왜 핀란드를 선택했을까를 생각해봤어. 감독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극 중에 나오는 기홍의 대사처럼 조용하고, 깨끗하고, 눈이 많이 오기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그들의 끌림이 눈밭에서 녹아버리고 사라져 갈 때 즈음에, 회색빛 서울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이어가지만, 서울은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시선과 무게가 오롯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어, 위험한데?"
"괜찮아요. 와보세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처럼, 이윤기 감독 역시 영화 첫 부분에, 영화의 결말을 예고하는 장면을 넣어놨어. 상민이 얼어있는 호수 위로 걸어가는 기홍을 보며 위험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기홍은 괜찮으니까 와보라고 해. 하지만, 몇 걸음 걸어가던 기홍은 장난이라며 다시 돌아오고, 결국 그들은 얼어있는 호수를 건너지 않아. 그들의 사랑은 얼어있는 호수처럼 위험해. 어디에서 빠져버릴 지도 모르니까.
서로에게 달려가던 기홍과 상민이, 서로에게 향하던 걸음이 엇갈리다가 결국은 멈춰. 사랑이 시작되었던 핀란드에서, 마지막으로 기홍을 향해 달려갔던 상민의 걸음이 하얗게 쌓인 눈밭 위에서 멈추고, 상민을 향해 달려가려던 기홍 역시 멈추지.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를 멈추었을 때, 그들의 사랑이 비로소 끝났음을 알게 돼.
우리는 어쩌면 기홍처럼 애매모호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느 중간 지점에서 살아가거나, 상민처럼 고단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그렇게 견디고 있는 지도 몰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기며,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하면서 말이야. 기홍과 상민은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어.
눈밭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 위로,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어.
결국은 녹아 없어질 눈밭 위에, 우리는 그렇게 불안한 모습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