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3자리 숫자가 통장에 다달이 찍히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서울에서 마련할 수 있는 방 한 칸이 없었기 때문에, 회사 근처의 고시원에서 서울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고시원 방은 언제나 눅눅했고, 옵션으로 선택했던 창문은 얼굴도 제대로 내밀기 어려운 정도의 크기였지만, 매달 45만 원이나 내야 했다. 복도는 늘 어두웠고,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야 하는 곳이었다. 옆 방에서 자고 있는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 수 있는 피곤함이 언제나 나에게는 배어 있었다.
회사생활은 쉽지 않았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피곤했다. 하는 일이 있어도 없어도 늦게 퇴근했고, 일찍 출근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태어나 처음으로 방광염에 걸려서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매일 약을 챙겨 먹었다. 아픈 걸 광고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아픈 건 표가 났다. 하지만, 난 그때 처음으로 아픈 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여태까지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아프면 위로받고, 주변에서 걱정해줬었는데, 이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아프면 혼이 났다. 자기관리 못한다는 이유로, 아파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단 이유로 혼이 났다.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새벽이 되면 아버지는 가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쳤다. 저녁에 들어오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고,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며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기는 해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매일 일터로 향하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아버지가 가진 모든 책임감이 묻어났다. 아버지는 어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어느 새 어른이 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누워있던 내 인생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매일마다 직장으로 향했다. 나는 내가 가진 책임감을 그렇게 세상에 보여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야 어른이 되었음을 느꼈다. 아버지의 삶과 닮아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스무 살의 나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듯 뜨거웠고 가벼웠다. 마치, 스무 살이 내 인생의 마지막 인 것처럼 나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남김없이 하기 시작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의 나는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솔직했다.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울면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이 늘 주변에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겁이 없었다. 아이 같은 면이 더 많았던 때였다.
서른 살을 앞두고 있는 내 눈을 어느 날 본 적이 있다. 겁이 많아졌고,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하루하루 힘들어하는 지친 어깨가 나를 한층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조금 슬픈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람에게 가슴이 떨리기는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고, 만나기는 하지만 금방 질려 버렸다. 마치 공짜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대출광고가 난무하는 미디어가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급하면 쓸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다시 어울려야 하는 게 겁이 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 지팡이처럼 나도 어느 상점에서 가면을 새로 구입해야 할 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이 신나던 시기를 지나서, 익숙한 것이 지겹지만 좋은 나이가 되어 버린 지금의 나를 어른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스무 살의 반쪽 짜리 어른으로 남고 싶단 생각을 하곤 한다. 어른이 되는 게 좋기만 하던 그 시절 말이다. 물건을 주문하고 배송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나는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다. 막상 물건을 받아보니 무겁고, 신상도 아닌 데다가 금방 질려버릴 거 같은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반품도, 환불도 되지 않는 신기한 물건이어서 어지간히 나를 놀라게 하였다.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이 많아졌고, '이제 애가 아니잖아'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아이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얼마나 슬픈 말인가. 늘 아이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아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그것도 남들이 내뱉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의해서 말이다.
추억이 많아지면 어른으로 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거 같다. 그땐 좋았지, 라는 등의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 친구들을 만나면 먼지 날 거 같은 그 과거 어느 날의 우리가 교복을 입고 했던 많은 일들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기분에 취한다. 교복을 입고는 들어올 수도 없었던 술집에서 말이다.
작년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하나 구했다. 회사에서도 업무 상 수많은 계약서를 작성하지만, 회사가 아닌 내 인생의 계약서는 언제나 그렇듯 더욱 긴장된다. 부동산을 왔다 갔다 하고,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마치고 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나만의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다. 내 인생을 7평짜리 원룸에 모두 꾸겨넣고 나니,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다림질이 필요한 구석이 많았지만, 구겨져 있는 것들은 그것대로 멋을 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내가 어른이구나 라고 느꼈던 시점이다.
어느 누구도, '나는 어른이다'라고 매번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무게감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견디는 것이다. 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견뎌낼 때, 우리는 '어른 답다'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닐까 싶다. 숨지 않고, 내 인생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때 말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울 때마다, 지금의 일상을 이룬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 새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다. 돌아갈 수 있다면 스무 살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위의 글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어른이 된다는 건' 출간 기념행사로 독자 에세이 공모전에서 당선된 글입니다. 민음사에서 진행된 공모전으로, 민음사 공식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운이 좋게도, 당선이 되어 브런치에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