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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서윤 Sep 04. 2016

어느 날 엄마가 된 여자
어느 날 엄마를 갖게 된 여자

- 엄마와 나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엄마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나이보다도 한참 어린 그 여자는 여섯 살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스물세 살에 만나게 된 여섯 살짜리 아이를, 어느 날부터 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야 하는 여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짐작도 되지 않는다. 


유치원을 가게 되어 비로소 세 식구가 같이 살게 되었을 때, 엄마와 나는 서로를 어색해했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할머니 집에 장난감을 사들고 찾아왔던 엄마. 그 장난감이 지겨워질 정도로 가지고 놀았을 때,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나대로 일곱 살이 되어서야 함께 살게 된 부모님을 어색해했고, 엄마는 일곱 살 여자 아이와 함께 살게 되어 어색해했다. 


마치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같았던 일곱 살 아이와 스물네 살의 여자는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에서 만났다.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몰랐던 나는, 엄마가 읽어주는 이솝우화를 통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읽고, 그렇게 나는 글을 알아가듯 엄마와 가까워졌다. 


어디를 가든 엄마가 가장 젊었고 어렸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나이를 숨겨야 했다. 엄마의 나이는 때때로 바뀌었고, 나는 그것이 아이러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부모님의 학력이며, 직업이며, 나이며, 개인 신상정보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적어 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매년 나의 꿈이 바뀌는 것처럼, 매년 엄마의 나이도 바뀌었다. 그래서 몰랐다. 엄마가 몇 살인지... 


어느 날 엄마가 사진을 찍으러 나가자고 했던 날이 있었다. 엄마의 손에 들려진 일회용 카메라는 나의 어린 시절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집 앞에서, 학예회를 마친 후에, 엄마는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고, 나는 엄마를 바라봤다. 나에게도 처음으로 사진앨범이 생겼다. 


시골에 살았을 때, 돈을 벌기 위해 지금은 같이 못 사는 거야,라고 이야기해주었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만나러 와주고, 드디어 일곱 살 때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같이 살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할머니의 보살핌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라는 존재가 그리웠다. 아주 일상적인 보살핌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엄마가 엄마여서 좋았다. 그러니까 엄마라고 부를 존재가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낳아준 친모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믿고 의지하던 엄마가 사라져 절망했다. 어느 날 엄마가 사라진 것이다. 


엄마는 외로웠고 방황했다. 엄마는 어렸다. 나도 어렸다. 그래서 엄마를 몰랐다. 나는 그저 엄마가 좋았으니까. 누구에게나 그렇듯, 엄마는 그저 엄마여서 좋은 거니까. 엄마의 외로움은 나에게 전달되어, 절망감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반쪽짜리 같았고, 모든 것이 사라진 느낌. 그래서 많이 울었다. 엄마라고 계속 불러도 되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다고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또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는 나에게 아직도 엄마로 남아있다. 엄마도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서로를 더 알아가기 시작한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고, 어른들이 해주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친엄마며 새엄마며 구분하는 것조차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는 의미 없지만, 어른들에게는 감춰진 이야기가 많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엄마의 나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가 늘 숨겨야 했던 진짜 나이를. 

스물세 살에 만난 여섯 살 아이를,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엄마는 아빠의 청혼을 받고서 나중에야 알았다고 했다. 아빠가 찾았던 사람은, 배우자가 아니라 나를 키워줄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장난감을 사들고 엄마 아빠가 시골로 찾아왔던 날은, 할머니에게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찾아온 날이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로,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시작했고, 그 시작에 나 역시 함께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된 여자와 어느 날 엄마를 갖게 된 여자는, 그녀가 나를 처음 만나러 와줬을 때의 나이만큼 같이 살고 있다. 시간이 흘러서 모든 것들이 이제는 자리 잡고, 자연스러워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나는, 나를 만나러 와줬던 엄마를 생각한다. 할머니가 엄마라고 가리키는 데도, 가까이 가서 안기지 못했던 나와 안아주지 못했던 그녀를 나는 우리의 첫 만남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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