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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서윤 Jul 08. 2017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날

나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잘 되지 않는 날에 나는 한 번씩 좌절하고, 그렇게 잠시 멈추고, 숨을 잠시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는다. 숨을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마치 시간에 역행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밀려오는 시간에 반항이라도 해보겠다는 듯이 나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평소에는 내 곁에 있는지도 몰랐던 시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날에는 그 존재가 내 곁을 지키며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좌절하고 또 좌절하는 날에는 그렇게 시간을 아주 천천히 지켜보며 가만히 있는다. 해야 되는 많은 일들을 뒤로 미룬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자, 이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후회하게 되는 가장 어리석은 짓일지라도, 좌절하는 날까지 나를 몰아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몰아세워 나를 절망에 빠뜨리지 않는다. 


시간을 천천히 보내기 위해 책을 집어 들 때도 있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볼 때도 있다. 때론 그저 잠을 잘 때도 있다. 좌절의 냄새가 나에게 빠져나가 다시는 내게 찾아오지 말라는 나만의 주문이다. 좌절의 냄새는 지독하다. 아주 빠르게 우울감을 가지고 올뿐만 아니라, 아주 빠르게 덫에 걸린 어린 짐승처럼 허우적 대게 만든다. 이곳이 바다인지 아니면 육지인지 모를 정도로 좌절의 냄새는 환각증세를 일으킨다. 


그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좌절의 냄새가 나에게 짙게 베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걷고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다. 밀려오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미뤄놓고, 내가 가장 할 수 있는 게으르고 행복한 일들을 하는 것이다. 숨을 멈추었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내 안의 공기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는다. 그리고 내가 내보낸 공기가 어디로 떠나가는지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허공을 응시하며, 나는 그렇게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내쉬기를 반복한다. 지구 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가늠할 수 있다는 듯이 나는 그렇게 눈을 떴다가 감기를 반복한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날에 나는 아주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 그 존재를,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내 곁에 두어 나의 좌절을 다독이게 한다. 나의 슬픔이, 나의 좌절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 과정을 그 시간만큼은 지켜보게 만든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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