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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사이다 Apr 09. 2024

소비의 시대에 절약으로 역행하다

세상에는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오늘 내가 산 것은 확실한 것이고, 내일 내가 벌 돈은 불확실하다. 오늘 배송 온 유행을 타는 옷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건강을 위해 밤에 먹지 않은 치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 자신을 관찰해 보면 (스스로 해보면 재밌다), 불확실한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나의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불안감을 조장하는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희열에 중독되는 과정은 스스로 눈치채기 어렵다. 확실한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떠한 자극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지루하다’라고 느껴진다면, 스스로 도파민에 중독이 된 것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소비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의식적인 행위이다. 논리적인 생각을 통한 의사결정이 아니라, 호르몬에 지배받은 결정이다. 돈을 버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1-2%의 추가 연봉 상승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1%의 연봉이 오르면 2% 소비가 늘고, 5%의 현금이 늘어나면 10%의 빚이 늘어난다. 이것을 깨닫기 어려운 것은 소득이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잠깐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비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미래에 소득이 올라서 충당해 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비라는 폭탄을 넘겨주고, 현재의 나는 거기에 소형 폭탄을 덧붙여서 미래의 나에게 넘긴다. 미래의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미래에 고통받을 나 자신에게 현재의 나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심하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득이 올라가는 속도보다 소비가 커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돈을 한 번에 많이 벌었다면 소비는 자전거의 속도 정도가 아니라 제트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 정도로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돈을 벌었다’라는 의식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의식이 현실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자신에게 자신이 부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소비를 늘린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자이길 원하는 자아가 만족할 수 없다. 그 자아가 어느 순간 ‘아 이제 충분해. 그만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미래가 올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도파민에 중독되면 미래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점점 짧아진다고 한다. 소비에 중독되기 시작하면, 더 빠른 시기에 부자가 되길 원하고,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투자로 시작했던 주식은 도박으로 어느샌가 변해간다. 그리고 여러 사기에 취약해지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도파민 중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소비가 아니라 절약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소비는 무의식적인 행동이고 절약은 의식적인 행동이다. 소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소망(내년에는 돈을 더 벌 거야!)과 눈에 보이는 것(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차)에 이끌리지만 절약은 지금 당장 확실하게 돈을 만들어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절약은 단지 현재의 돈만 더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늘어날 소비를 지금부터 근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투자보다도 수익률이 높다. 스스로 경험했듯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돈을 쓰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지금 절약을 한다면 앞으로 살아갈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쓸 수많은 돈과 그에 따라 없어질 나의 자유를 사게 된다. 작년 가을, 스스로도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나는 스스로 검소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여러 방면에서 불필요한 돈을 여기저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그런 자각을 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축복이다. 그때부터 돈을 지불해서 다른 사람이 하게 하는 일들을 멈췄고 (택시, 집 청소 등), 퇴사하고 나서부터는 나의 지출을 모두 데이터화해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있다. 지출은 순식간에 1/3로 줄었다.


지출을 줄였기 때문에 나는 불행해졌을까? 아니, 더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졌다. 나를 숨을 죄어오던 도파민으로부터 공간을 확보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숨을 쉬며 살고 있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낭비를 하며 살아왔는지 소비라는 도파민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었는지 거기서부터 벗어나보니까 비로소 보인다. 절약은 조금 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요리를 하고 반찬을 얻기 위해 부모님 집에 더 자주 들르며 가족과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절약을 통해 가족이나 이웃과 서로 도우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도우며 사는 삶에 행복이 들어있었다. 돈이라는 것이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약의 가치가 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돈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개념과 무더기로 함께 버무려져 있는 불안감과 중독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는 것이다. 절약하고 절제하는 것은 고통스러우며 돈을 버는 것에 비해서 재미도 없고 지루하다. 하지만 지금 이 지루함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미래에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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