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시작은 괴롭다
작년 10월 독립출판을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누나와 함께 “독립출판하자!”라고 다짐했을 때는 머릿속에 어느 정도 구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주제를 구체화하려니 막막했습니다. 종이책, 블로그, 회사 문서 등 다양한 곳에서 글을 써본 경험이 있음에도, 여전히 ‘첫 문장’을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좀 더 수월해져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해진 주제가 없으니 고민만 깊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이미 써둔 글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출판을 준비하려면 글쓰기 외에도 할 일이 많으니 에너지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이전에 쓴 글이 형편없거나 너무 짧았다면 고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행히 철학을 주제로 브런치북을 완성한 적이 있었고 그 글은 ‘왜 자신만의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다룬 짧은 책이어서 활용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브런치북을 그대로 책으로 옮긴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책이라면 브런치북보다 더 ‘나만의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독자를 설득하는 글도 좋지만 자연스럽게 공감과 끌림이 생기는 글이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쓴 글은 설득에 치중한 나머지, 다소 억지스럽게 독자를 붙잡으려 했던 면이 있더군요. 글이 꼭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 좋다”라는 느낌만으로도 글이 주는 만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결국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즈음, ‘철학을 직접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는 어렵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철학을 만든다’는 발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앱도 직접 만들어보기 전에는 그 과정이 막연하게 느껴지듯, 철학도 직접 만들어보지 않으면 미지의 영역으로 남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며 쌓아온 생각들과 공부를 통해 배운 진실들을 공책에 마구 적어놓고 곱씹어보았습니다. 결국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했고, 비록 다른 사람이 보면 보잘것없는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저만의 시각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습니다.
그 과정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철학과 그 철학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책으로 풀어보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머신러닝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이미 존재하던 강화학습 자료를 쉽게 정리해서 옮겨놓은 것뿐이라, ‘내가 쓴 책’이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내 생각을 온전히 담아보겠다는 도전의식이 생겼고, 스스로를 작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하지만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학을 전하지만 독자를 설득하지 않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대개 ‘철학’이라 하면 세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반박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마련이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논리적 설명과 증명이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나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가볍고 일상적인 철학’이었습니다. 논리와 체계를 세우면 보통 생각하는 철학에 더 가까워질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 입장에서는 자칫 ‘설득’에 맞서 방어 태세를 갖출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책에서 논리적인 부분을 빼면 학문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전문성을 쌓으면 훨씬 더 정확하고 체계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해서 글의 가치나 매력이 반드시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글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니까요. 저는 글이 단어와 문장, 문단들이 서로 이어지고 충돌하며 만드는 일종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긴장감이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글의 묘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전문적이지 않으니’라는 핑계를 대지 말고, 일단 쓰되, 재미있으면서도 깊이가 느껴지고,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무렵,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누나에게 제 철학을 설명하던 때를 떠올리니, 평소 인상 깊게 봤던 영화들을 예로 들며 말했을 때 훨씬 이해를 잘 하고 흥미로워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 일로 ‘영화’라는 매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술, 특히 영화는 철학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인생에 대해 차분히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제가 하려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큰 울림을 얻거나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본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요. 영화를 소재로 삼으면 지나치게 논리적 설득에 치우치지 않고도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는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쓰고자 하는 책의 핵심 방향이 되었습니다. 철학이든 영화든, 결국은 ‘어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으니까요. 독자가 이 글을 통해 작은 사유를 엿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철학을 영화라는 매개체와 함께 풀어나가기로 했습니다. 논리적 체계로 완전히 무장된 철학서가 아니라 편안하면서도 사유의 여지를 주는 이야기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