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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근지 Sep 24. 2021

땅에 나는 별

반딧불이와 17년전의 연사

  반딧불에 대한 추억은 뜬금없게도 목청 높은 12살 연사의 소리높은 웅변으로 시작한다. 초등학생 때 나는 웅변부에서 열정적으로 활약했다. 에이포용지 한장 분량으로 환경, 전쟁, 빈곤 등 그 시절에 그 깊이를 알았는지 모를 사회의 쉽지 않은 문제들의 해결을 호소했다. 웅변부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나를 원정 보냈는데 그 첫 시작이 바로 무주 반딧불 축제의 웅변 대회였다.

 

17년전, 반딧불 축제의 연단에 선 나.


 학교를 대표하여 대회를 나간다며, 무기력하게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두고 선생님과 함께 교실 앞문을 열던 마음이 어찌나 웅장해졌는지 여즉 기억이 난다. 그렇게 커다란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연단에 올랐다. 투지가 득 찬 나는 열과 성을 다해 외쳤지만, 아쉽게도 나는 참가자 전원이 받는 입상을 받고 실망한 채 회장을 뒤로 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복작한 축제장이 눈에 들어왔고 그저 꽁무늬에 빛이 나는 반딧불이라는 벌레가 있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그 날 결국 반딧불이는 보지 못했는데, 전시장 한켠의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반딧불이의 유충을 본 기억이 있다. 빛나지 않은 것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시기였는지, 아니면 심사 판정의 불만을 품고 말았는지 모르겠지만 유충을 포함한 축제장의 요소들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했다. 나는 입이 삐쭉 나와서 ‘아무나 다 주는’ 상장을 끌어안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사실은 반딧불이의 유충도 빛이 난다고 한다.



  그렇게 17년이 지났다. 어떤 이유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간의 요양(?)을 하고 명절도 보낼 겸 고향에 내려왔다. 부모님이 이즈음엔 천변 산책로에 반딧불이가 있다는 얘기를 하셔서 궁금하기도 하고 집을 나섰다. 처음엔 반신반의 했으나 진짜 야생의 반딧불이를 보게 되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울 옹색한 불빛이지만 포르르 날아다니는 게 참 재미있었다. 땅에서 별이 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요리조리 옮겨다니는 반딧불이에게 눈길을 주며 생각했다. 화려하고, 모두가 부러워하고, 만인에게 명예로운 태양 같은 삶이 아니고, 총총이 본분을 다하는 반딧불이처럼 살면 좋겠다. 시골 천변에 쌍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차들은 못 보고, 밤공기에 달릴 맛 나는 바이커들도 못 보지만, 휘적휘적 밤길을 걷는 선한 사람들에게 예쁘고 빛나는 그런 존재이자, 소중하고 깨끗한 생명으로.



반딧불이의 성충 모습.



 문득 반딧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반딧불 축제에 갔던 17년 전의 연사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이제는 그때만큼 스피치를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부르짖었을까 생각하면 놀랍다. 지금은 재난에 대한 관심은 커녕 통장 잔고에 무릎꿇고, 불의에도 아니오라고 못하는, 팍팍한 바보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앙칼진 목소리의 꼬마 연사가 나의 어딘가에 남아있었을까? 사회생활 잘 하는 호구 소리 듣던 내가 회사를 그만둔 건 역시 신기하다. 반딧불이가 알려준 것 같다. 이리저리 치여 살아도 내 꽁무늬에선 겁없는 연사가 매일매일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이제 시작이고 종종거리며 또 살아야할 앞날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 날 나를 포함한 목청 높여 외친, 반짝이던 어린 연사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귀여운 반딧불 축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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