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용하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변화의 요구는 오래가지 않는다.
기술이 날로 발전해도 사회는 잘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사회는 이를 전부 수용치 못 한다. 변화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사람도 정작 자기 주변의 환경 변화는 원치 않는다. 꼭 이념적으로 보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머무는 자리에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대 변화의 동력이 된 세대는 주로 젊은 층이었다.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줄곧 변화를 주도했다. 한데 유독 젊은 계층에서 변화를 위한 실제적 행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잃을 게 없기 때문. 사람은 누구나 소유물이 있을 때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 소유물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가 변화의 주체로서 지금껏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게 없기 때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권력을 자신들에게 끌고 오기 위함이다.
이처럼 큰 틀에서 볼 때, 꼬리칸의 지도자 커티스가 일으킨 반란은 열차 내의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집단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자는 갖기 위해, 가진 자는 지키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흔히 기업의 목적이 이윤 창출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보다 상위의 목적은, 기업의 영속성이다. 이윤 창출이 큰 폭으로 상승하면 물론 영속성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이 미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내년에 당장 기업의 문을 닫아야 한다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비단 기업뿐이 아니다. 국가도, 다른 어떠한 조직도 사실 영속성을 최상위 목적으로 둔다.
메이슨 총리: “애초부터 나는 앞쪽칸, 당신들은 꼬리칸, 제자리를 지켜!”
메이슨 총리의 말처럼 꼬리칸의 사람들이 제자리를 지켰다면 아마 별다른 갈등 없이, 적어도 외관적으로는 안정의 모양새를 뗬을지도 모른다. 설국열차란 전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앞쪽칸만의 논리이자, 그들의 잘못을 합리화시킨 말에 불과하다.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바로 끼니를 때우고, 비좁은 방에서 지내야 했던 꼬리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집단적 움직임이 불가피했다.
봉준호 감독은 그런 면에서 조직의 생리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는 커티스가 막상 앞쪽칸에 도달했을 때 어떠한 인간적 고뇌에 빠질지 잘 알고 있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온갖 부조리를 견뎌내는 이등병들은 자신들이 선임 병이 되었을 때 악습을 근절시키겠다며 굳은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렇듯 막상 선임 병이 되어서도 그런 관행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한 입장과 환경이 달라지고, 그 환경에 따라 적응해버린 탓이다.
아마도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가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열차의 문을 폭파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면, 커티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절대권위자 윌포드의 달콤한 제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 커티스도 설국열차 내의 개체수를 조절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반란을 일정 부분 허용했을 것이다. 물론 초심을 지킨 소수의 사람들로나마 사회가 이 정도로 변해왔던 것이지만,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변화의 요구는 오래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이를 꼬집었던 셈이다.
영화에서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 속한 조직에서 떠나는 것을 제시했다. 조직의 내부에서만 발버둥치는 근시안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조직을 떠난다면 희망을 볼 수 있다 말했다. 그러나 과연 떠나는 것만이 훌륭한 답안지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북극곰이 살 정도로 온도가 조금 올랐다고 해도, 영하 수십 도를 육박하는 맹렬한 추위는 여전했다. 갈등을 빚는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오는 건 그저 하나의 방법일 뿐인데, 영화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비춰져 다소 아쉽긴 하다.
영화 <설국열차>는 어려운 영화였다. 난해한 소재를 가지고 나온 만큼 솔직히 영화를 완전하게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봉준호 감독이니까.’ 확실히 이는 봉준호 감독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는 항상 이렇듯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우리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하나씩 던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유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항상 빛이 났고, 또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다. 역시 영화관을 나오는 우리의 최고의 찬사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었다.
작가의 한줄평
역시 봉준호 감독만이 가능한 영역이었으나,
메시지의 가짓수가 많다 보니 과부하가 왔다.
2017.09.08.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