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독자들이 베스트셀러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는 ‘지독한 마케팅의 산물’, 다른 하나는 ‘저자의 이름값’, 그리고 마지막은 ‘순수한 재미 결정체’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세 번째 요소가 가장 중요하긴 하겠지만, 사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이 세 가지 요소 전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세 요소가 전부 조화를 이루는 도서다. 그의 명성이야 애써 설명할 필요 없고, 여행이란 키워드 또한 이미 우리에게 굉장히 밀접하다. (마케팅적으로 봤을 때도 ‘여행’은 아주 훌륭한 키워드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 ‘순수한 재미’ 역시 이 책에 진하게 배어 있다. 과연 세 가지 요소 다 충족하는, 재미난 도서다. 김영하 특유의 문체 또한 재미났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걸지도 몰랐다. 이 책의 내용이 재밌었다기보다 그 문체에 깊이 빠져 버린 것이다.” -2019년 4월 17일 출간한 김영하 산문집 <여행의 이유> 추천사.
① <여행의 이유>는 어떤 책?
이 책을 특정하게 규정짓는 건 어렵다. 이게 여행 에세이인지, 아니면 그냥 평소 생각을 담은 글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 책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구분 짓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여행’에 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이 책에선 어떤 특정한 시기에 다녀온 여행기가 드러나 있지 않다. 여러 여행기가 얽히고설켜 있다. 보통의 여행에세이와는 다른 양상이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예전 다녀왔던 여행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식이다. 이 책은 그렇게 현재로부터 과거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여행지로 계속 거슬러 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를 찾았을까. 책 속에서 중간 중간 나름대로 정의한 여행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꽤나 설득력 있다. 우리가 다녀오는 여행의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고, 혹은 그런 것 따윈 모르고 떠났으나 이제와 생각해보니 저자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으로 꼽고 싶다. 누구나 갈망하는 여행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그가 다녀오는 여행의 이유 또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또 몰랐던 여행의 이유를 알게 해준다는 것.
이 책을 읽고 각자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단 단편적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파고들어 그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주고, 자신은 그 감정을 왜 그토록 갈망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의 이유가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② <여행의 이유> 좋았던 점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그전에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읽어본 적 있으나 실망해서 그 이후로 그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 실망이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여행의 이유>, 너무 재밌었다. 그의 글에 흠뻑 빠졌다. 책의 ‘내용’보다 그의 ‘글’이 재밌었다. 이해되나. 내용보다 글이 재밌었단 말이.
별 내용 아닌데도 이상하게 재밌었다. 글을 읽는 건데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알쓸신잡’에서 말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도 혼란스럽지 않았다. 글을 잘 쓰려면 역시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③ <여행의 이유> 아쉬웠던 점
아쉬웠던 점은 딱히 없다. 그저 온전히 책을 즐길 수 있다. 비교적 짧은 책이지만, 많은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불뚝 솟아오를 것이다. 저마다의 여행의 의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며 읽었으면 좋겠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나지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p67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p82
내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뭔가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읽어주지 않던 시절에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지금과는 달랐다. 외국에서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그저 젊은 여행자일 뿐이었지만, 적어도 거기서는 여행자가 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주목이라도 갈망하던 시절, 여행자라도 된다는 것은 그런 욕망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주었다. p151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180
⑤ <여행의 이유>를 읽고 든 생각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무엇일까.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자발적으로 떠난 여행의 경험이 별로 없다. 국내여행 한두 번 정도? 그것 외에는 자발적으로 떠난 적이 없다. 나는 그것보다 거주하고 있는 곳 근처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집 근처 카페를 가거나 그냥 가볍게 한강을 산책하는 것, 좀 더 멀리 간다면 서울 시청도서관을 걸어 다녀오는 것. 그 정도의 일상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왜일까.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 나오는 상황보다 통제 가능한 상황을 좋아하는 걸지 모른다. 집 주변, 넓게는 서울은 나에게 혼란을 주는 곳이 아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뭐 타고 들어오면 되고, 어디서 휴식하면 되는지, 머릿속에 단박에 그 그림이 그려진다. 편안하다. 안정적이다. 계획대로 몸을 움직인다면 큰 변수 없이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여행은? 여행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의 ‘천지’다. 변수가 터져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어디서 쉬어야 하는지, 무얼 타고 숙소에 가야 하는지, 막막한 상황의 연속이다. 혼란이다. 불안이다. 여행은 나에게 혼란과 불안을 주는 행위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가능성을 줄이려 한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그 가능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다.
2019.05.15.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