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이상했어요. 왜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렇게 가슴이 턱턱 막혔을까요. 왜 마음이 먹먹했을까요. 왠지 들켜버린 것 같았어요. 저의 민낯이, 속마음이, 밑바닥이. 저는 작가의 글을 읽었지만, 제가 마주한 건 제 자신이었어요. 완전히 까발려진 날 것의 저요. 작가가 느낀 감정은 전부 저도 느껴본 것이었어요.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느낀 감정은 비슷했죠. 그 마주함이, 그 답답함이 썩 나쁘진 않았어요. 뭔가 마음을 한 번 걸러낸 듯한, 그렇게 조금 더 '나'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렇죠. 때론 답답하고, 때론 공허하고, 때론 무기력하고, 뭐가 인생인지, 옳은 길인지 알지 못한 채 어디론가로 휩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 그런 인간의 본모습, 날 것의 모습, 솔직한 모습을 작가에게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2018년 12월 27일 출간한 박정언 에세이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추천사.
①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은 어떤 책?
제가 읽은 것 중 손꼽히는 에세이예요. 재밌게 읽은 에세이가 점점 쌓이고 있어서 좋네요. 에세이는 서로 비슷하면서 달라요. 삶의 모습은 달라도 느끼는 감정은 서로 비슷하다는 게 공통점이라면, 결국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감정 또한 미세하게 달라진다는 것이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저는 에세이를 좋아하죠. 비슷한 감정을,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 책 또한 그런 감상을 듬뿍 듬뿍 느낄 수 있게 해주었어요. 고마운 에세이죠.
이 책의 저자, 박정언 작가는 현직 라디오 PD예요. 그래서 그에 관련된 일화도 많이 들을 수 있었죠. 특히 MBC 파업이나 세월호 사건 관련돼서도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어요. 내부자였던 그녀는 그 안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들어볼 수 있었죠. 작가는 사회에 나와 이직을 한 번 거쳤는데요. 첫 사회생활은 중앙일보에서 했다고 해요. 기자로서요. 그러나 그 기자 생활이 생각보다 녹록치 않아 근 1년 만에 방송국 PD로 이직을 했다고 해요. 그 1년 동안 있었던 일, 느꼈던 감정들도 여러 편에서 다루고 있어요.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초년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것이었죠.
사실 에세이를 어떻다 규정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것이 그렇게 유의미한 일인지도 모르겠고요. 에세이는 그저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사람은 전부 다르기 때문에, 누가 쓰냐에 따라 책의 느낌도 다 달라지죠. 그러니까 책이 주는 느낌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돼요.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죠.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공감하면 되고, 아닌 게 있다면 그냥 그대로 흘려보내면 돼요. 에세이는 구미에 당기는 것만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아닌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죠.
②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좋았던 점
작가가 갖고 있는 감성의 농도가 굉장히 진해요. 사소한 일상도 쉽게 넘기는 법이 없죠. 사소한 일상 속 장면을 포착했다가 그것을 디테일하게 글로 풀어놓아요. 웬만한 감성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것을 그렇게 세심하게 담아내기란 어려웠을 거예요. 대부분은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일상이니까요. 웬만한 마음의 여유가 아니라면, 그 외부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다 받아들여 읽기 쉬운 글로 풀어놓았죠.
좋은 에세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작가가 글을 잘 쓴다는 거예요. 아무리 진한 감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글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그 에세이는 좋은 책이 될 수 없어요. 나의 감정을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작가가 가져야 하는 필수적 능력이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작가의 글은 완전 수준급에 해당해요. 술술술 잘 읽히죠.
③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아쉬웠던 점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쓴다면 그 에세이는, 어떤 글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아쉽다 평가하기 어려워요. 나와는 맞지 않다, 정도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이 아쉬웠다는 건 글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닌 이상 평가하기 어렵죠. 물론 저자가 갖고 있는 사상이나 생각이 자신과 맞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 역시 아쉽다라기보단 맞지 않는 것에 해당할 테고요.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좋게 읽힐 에세이가 아닌가 싶어요. 작가가 전하는 글이 분명 여러분의 가슴을 따듯하게 달굴 것이에요. 이 책에서 받은 위로가 시간이 지나도 꼭 생각날 거예요.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도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제는 오랜 친구를 만나도 급히 안부를 묻고 커다란 변화들을 브리핑해야 한다. 일상의 언어들, 일을 위한 말들, 꼭 처리해야만 하는 말들만으로도 쉬이 목이 아파오는 탓이다. p14
그럼에도 그에겐 여전히 불리고 싶은 이름이 존재한다. 하고 싶은 일이 존재한다. 가능성이 보여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꿈꾸는 게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가 안 되는 일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포기조차 잘 되질 않아서. 나 역시 모르는 마음은 아니었다. p26
행위는 지속될 때 빛을 발한다. 이 명제는 '보통의 존재'들뿐 아니라, 보통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오로지 지속될 때만이, 행위는 그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바꾸어가며 진화한다. 그러니 그 어떤 작은 가능성이라도 기대한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한다. 계속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한 음 한 음을 쌓을 것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일기나마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는 것처럼. 내가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고 좋아해온 '언니네 이발관'처럼. p29
매일 울고 있으면 그게 이상한 줄도 모르게 된다. 혹시 내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주 우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더 많이 말하고 엄살도 좀더 부렸을 것 같다.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난다고.
모든 눈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걸,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p46
어떤 일을 가진다는 건 전인격적인 사건입니다. 일의 성격에 따라 제가 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완전히 달라지죠. 사소하게는 옷 입는 스타일부터 전화 통화에 응대할 때의 말투까지 모두 변합니다. 자주 만나는 집단이나 사람들과의 대화 주제 역시 완전히 다르죠. 제 경우엔, 심지어 자주 꾸는 꿈의 내용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스스로에게 조금 더 맞는 일을 찾아간다는 건 간절한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원래의 제 모습을 크게 바꾸거나 욱여넣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저는 아직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지난 10년간 조금씩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자리를 찾아왔던 것처럼요. 어딘가엔 제 생긴 모양과 꼭 맞는, 그런 자리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p63-65
오래오래 회사를 다니다보면 난 뭘 합니다, 하고 소개하는 일이 덜 힘들게 될까요. 아무래도 배부른 고민일까요. 남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행복하신가요?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살아요, 하고 말했는데 갑자기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 일 같은 건 없으신가요. p77
어쩌면 장소에 대한 사랑은 마음이 만들어낸 최후의 방어선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 남는 것은 오로지 공간,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주는 위로에는 말없이 가만히 마음을 쓸어내려주는 것 같은 조용한 다정함이 있다. 오래되고 사려 깊은 이상적인 친구처럼 말이다. p148
⑤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을 읽고 든 생각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후면에 이석원 작가가 쓴 추천사가 있더라고요. 유명인이 쓴 이 책의 유일한 서평이었어요. 아무래도 그 주인공이 이석원인지라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죠. 그 내용을 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리고 싶어 이렇게 가져와 봤어요. 이석원의 글은 어디에서 보아도 반가울 따름이죠.
"9년 전 첫 책을 쓸 때 나는 이분이 보내온 편지를 보며 책은 이 사람이 써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게 된 그의 책을 펼치며 나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정도를 넘어 때때로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책은 이를테면, 몸에 밴 배려나 예의 같은 것들이 실은 따뜻함이나 정중함의 발로가 아니라 일종의 강박에서 비롯된 태도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쓴 글이다.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 평범하고 무딘 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섬세한 사람이 쓴 글. 그 섬세함을 과시하지도 부러 감추지도 않는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으로 그가 본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읽어나가는 일은 흥미롭다. 에세이라면 대개 감동이나 교훈 둘 중 하나는 노리기 마련인데, 나는 다른 책에서는 이런 글을 좀처럼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마치 신문 사회부 기자의 사건일지를 보는 듯 감동을 자아내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는 서늘함. 그 서늘함을 기어이 뚫고 나오는 일말의 따뜻함과 서글픔 같은 생의 감정들. 삶의 환등기처럼 그가 활자로 포착해낸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 있다. 덩달아 나의 삶의 한 시기마저 끝난 기분이랄까. 나는 이분이 부디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석원 (<보통의 존재>,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저자)
2019.05.18.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