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진짜’ 여행
역시 믿고 보는 한수희. 한수희 작가의 글은 묘하게 매력이 있다. 얼핏 다른 작가의 글과 비슷해 보여도,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도, 작가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이 책의 컨셉은 아주 단순하다. 매년 한 번씩 방문했던 교토의 이야기를 그저 글로 옮긴 것뿐이다. 어떤 한 장소에 매년 간다는 것이 매번 특별한 감정을 남기기 어려울 법한데, 작가는 여행의 사소한 부분을 잘 포착해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그곳에서 작가는 지난날의 자신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위해. 그런 점에서 작가는 누구보다 여행을 알차고 보람차게 보냈다 할 수 있다. 물론 여행 가서 무언가를 꼭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무언갈 얻어서 오는 게 더 나았다. 그 배움은 꼭 여행 중에 얻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여행 다녀온 뒤에 글로 남기면서 배움의 형태를 띠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여행 후에 그 감상을 남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사실 인생의 여기저기에 널린 돌부리에 거려 넘어지거나 때로는 웅덩이에 몸이 흠뻑 젖도록 빠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수투성이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힘내어 살아가게 한다. p22
-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중에서
한수희 작가의 책은 <온전히 나답게> 이후 두 번째다. 두 책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책이 더 좋았다. 책에서 조금 더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할까. <온전히 나답게>는 왠지 모르게 우울감이 흘렀다면, 이번 책은 평온한 상태에서 집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그저 나 혼자만의 감상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작가가 카페 운영할 적에 썼던 <온전히 나답게>는 카페 주인으로서 부담감을 일상 중에 자기도 모르게 안고 썼던 것일지 모른다. 당연히 가게의 매출을 올려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테지만, 항상 웃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한단 것에 더욱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과 괴리로 이어졌을 수 있고, 그런 부담이 자기도 모르게 글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2년간의 운영 끝에 현재는 카페를 접은 상태라 한다. 작가는 글쓰기에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확실히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일, 오래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그 점을 다시금 깨우쳤다. 그와 관련해 작가가 언급한 내용이 있는데, 공감이 돼서 아래에 남긴다.
꿈꾸는 일이나 시작하는 일, 그리고 시도하는 일은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견디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일을 할 때 견딜 수 있다. 아무 일이나 견디기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견딜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 다시 말해 견딜 수 있는 꿈을 꾸는 것, 그 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것, 그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p180
-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중에서
요즘 많은 여행에세이가 나오고 있다. 특히 독립출판으로 출간되는 양이 크게 늘었다. 그만큼 여행 콘텐츠의 수요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아졌다는 뜻이다. 작가의 성향에 따라 그 제목과 내용도 전부 제각각이다. 단순히 어딜 다녀왔고,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기록한 것에 그친 작가도 있는 반면, 여행지에서 득도를 한 것처럼 깨달음을 전하는 작가도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물론 내가 전부를 본 것은 아니지만) 여행지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그것을 통해 어떤 나와 마주했는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사실 진지하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서다. 무슨 여행까지 가서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해, 라며 수없이 대화를 요구하는 내 안의 나를 외면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든 그 후기는 쓰고 싶고, 이왕이면 책으로 내고 싶단 생각에 부족한 감상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별 감상을 느끼지 못한 에세이는 독자에게도 별 감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말 그대로 '앙꼬 있는 찐빵'이었다. 방문지는 교토 한 곳이었지만, 작가가 느낀 감성은 워낙 풍부해 그 어떤 여행에세이보다 내용이 알찼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 지역 명소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지난날, 아니 어제까지 애쓰느라 마음 고생했던 나 자신이다. 그곳에서 여유를 찾으며, 여유 없이 살았던 나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이유라고, 또는 여행의 이유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여행의 이유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저마다의 이유가 다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여행에세이를 출간하려 한다면 나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유머감각은 타인을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힘이다. 자신을 별 대단치 않은 존재로 볼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을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은 또한 이 인생이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삶 전체를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에서 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노화는 유머 감각 없는 노화인지도 모르겠다. p39
어쩌면 그 울림은 그 사람에게서밖에는 나올 수 없는 게 아닐까.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과 작가로서 그의 삶이 일치하기에,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기에,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쓰기에, 그래서 그 글이 잘 읽혔던 것이 아닐까. p64
-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중에서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이란 내게 '불안정성'을 야기할 뿐이다. 지금껏 간신히 지켜온 일상의 루틴을 스스로 깨어 버리는 행위고, 불필요한 불안정을 만드는 짓이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마음이 들뜨기보다 불안이 샘솟는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아깝다. 돈이 많았다면 아마 헛돈을 날리더라도 애써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은 내게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잠깐의 감동을 줄지 몰라도 그 여운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이 나에겐 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나도 가끔 할머니댁에 방문하는 걸 좋아한다. 시끄러운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시골의 할머니댁에 가는 걸 즐긴다. 그곳에 가면 나는, 나의 눈은, 나의 귀는 안정을 되찾는다. 자극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최근 할머니 생신 일로 할머니댁을 방문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힐링을 받았다. 한 건 딱히 없다. 그저 사위가 어둑한 저녁에 도착해 삼촌들과 식사를 했고, 밥 먹은 뒤 누워 TV를 보다 잤고, 그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다시 식사를 했고, 그 뒤 또 오후 늦게까지 낮잠을 잤다. 올해는 사촌들도 안 와서 딱히 놀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렇게 조용한 곳에, 곤충의 울음소리, 바람 소리가 나의 귀를 즐겁게 하는 곳에 있단 것만으로 지난날이 위로가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소음이 넘쳐난다. 어느 곳에서도 조용하게 있을 수 없다. 소음이 범람하는 곳에 있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지치게 된다. 나에게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예측 가능한 곳에 가끔씩 가 마음 편히 휴식하는 것. 그런 곳이 몇 곳 더 있다면, 그곳이 저자의 교토 같은 곳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 새로운 아지트를 더 만들어야겠다.
그렇다고 세상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기를 바란다. 먹고 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잡기에 실패하지를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 부모로서 나의 교육 목표는 오로지 그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익히게 하는 것. 현실에 잡아먹히지도, 이상에 눈멀지도 않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것. p79
-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든 여행 가고 싶어질 것이다. 여행에 별 관심 없던 나도 이 책을 읽고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저자처럼 1년에 한 번씩 같은 곳으로 여행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나처럼 예측 가능한 곳만 골라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예측 가능한 장소를 새롭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지금 사는 도시보다 조용하고, 자유롭고, 정이 흐르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일본도 괜찮은 선택지란 생각이 든다. (물론 최근 정치적인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일본에 가면 왠지 힐링을 받을 것 같다. 나도 저자처럼 한 달에 5만 원씩, 아니 10만 원씩 모아 1년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나볼까. 나만의 아지트를 만든다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간 여행에세이를 읽어도 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한데 이 책을 읽고 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여행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 잘 모르겠지만, 여행을 떠나면, 그러니까 이곳과는 완전히 무관한 곳에 가면, 이곳에서 겪는 인간관계의 아픔을 모두 잊을 수 있을까. 그것이 나와는 동 떨어진 것이라고 느끼게 될까.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다 그런 데 있는 것 아닐까. 이곳에서의 아픔을 잠시라도 떨쳐 버리고 싶어서. 나와는 무관한 아픔이라 여기고 싶어서. 모든 종류의 아픔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그만큼 우리의 삶은 고달프고 복잡하다. 힘든 일상 속에 잠시라도 아픔을 유예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만 그나마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여행이라면 나 역시 반가울 것 같다. 이곳에서 앓는 모든 종류의 아픔에서 잠시나마 멀어지고 싶다. 그래야 그 아픔도 별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2019.07.15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