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김민철 작가의 작품은 작년 8월 출간된 <하루의 취향>으로 먼저 만나봤다. 이 책은 출판사의 제의로 서평을 작성한 바 있다. 소소한 일상을 잘 포착해낸 좋은 에세이였다. 누군가는 그냥 스쳐지나갈 법한 일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세심한 시선이 <모든 요일의 기록>에도 드러났다. 정확히는 최근작인 <하루의 취향>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두 에세이는 비슷한 듯 다르다. <하루의 취향>이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면, <모든 요일의 기록>은 전반적인 인생을 담았다. 둘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원래 그렇다. 꽂히는 작가가 생기면 그가 어떤 글을 쓰든 다 재밌게 되어 있다. 내게도 그런 작가가 여럿 있다. 유시민, 한수희, 이석원 등이 그렇다. 김민철 작가 또한 그 범주에 충분히 들어갈 법하다.
작가는 기억력에 크나큰 약점이 있다고 고백했다. 카피를 쓰는 사람임에도 흔한 카피 한 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고. 그래서 기억하기보다 느끼기에 더 열중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억력이 나쁜 사람 치고는 소개하는 일화의 디테일이 남다르다. 세세한 말 한마디까지 다 기억하고 글로 전한다. 그게 기억력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확치 않은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기보다 단순 암기력이 부족한 것이고, 기억력을 사용하는 곳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작가는 결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도넛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검은 건반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칠판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스피커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계산기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법이다. 도마로, 붓으로 자동차로, 전화기로, 옷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없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옅은 파마약 냄새가 평생 따라다닌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분가루를 얼굴에 바르는 것처럼 밀가루를 옅게 온몸에 붙이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도망칠 수도 없다.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젊은 시절 내내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거울을 보면 아빠와 똑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66
- 김민철 작가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나야말로 기억력이 좀 나쁜 편이다. 그건 글쓰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묘사하려면 우선 그 장면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내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온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지만, 무엇 때문에 가슴이 불타올랐는지 전후사정을 쉽게 잊는다. 독자는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줘야 그것에 몰입한다. 그래야 그 글이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허나 나는 기억력이 부족한 탓에 상황을 온전히 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꾸며낼 순 없기에 생생한 감정만 전하곤 한다. 그것은 반쪽짜리 글이다.
에세이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내 이야기를 전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에 반응하고 공감을 한다. 반대로 허세 가득 찬 글도 우린 수없이 보아 왔다. 자신의 존재는 꽁꽁 숨긴 채 허영심만 가득한 글. 그런 글은 매력이 없다. 나는 글만 보아도 누구의 글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글이 좋다. 자신의 개성이 잔뜩 묻어나는 글. 평범한 사람의 감성이 드러난 글. 나 역시 부족한 사람이에요, 고백하는 글. 현실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의 글. 그런 글이 좋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공감대를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잘나고 멋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낮출 줄 알고 평범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나는 좋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이면 다 좋다.
야근을 해도 아침에 일어나야만 하고, 먹고 싶지 않아도 12시만 되면 밥을 먹어야 한다. 짬을 내어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며,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과 마주 앉아 몇 시간이고 회의를 해야 한다. 지금 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 일을 해야 하며,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도 지금은 ‘그’ 일을 해야 한다. 채워지는 것과 동시에 비어버리는 월급 통장에 약간의 기대를 해야 하고, 또 곧바로 실망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술을 앞에 두고도 누군가의 지겨운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하고, 노래방에 끌려가서 부르기 싫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p72
- 김민철 작가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65 페이지부터 68 페이지까지의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소제목은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 당신이 지금 그 상황에 놓인 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에 그런 것이다. 누구도 잘못이 없다. 그냥 그런 것뿐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원망하지 마라. 난 왜 그럴까, 한탄하지도 마라. 그렇게 태어난 것을 그냥 받아들여라.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나의 운명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불만을 가진 것은 딱 하나, '사랑'이다. 나는 사랑에 있어 불우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못해봤다. 남들 다 해본 걸 나 혼자만 못했다. 운명이 자꾸 나를 피해간단 느낌이다. 쉽게 풀릴 수 있는 것도 내 앞에서만 배배 꼬이는 듯하다. 나는 모든 것이 늦었다. 이성에 눈 뜨게 된 시기도 늦었고, 첫사랑도 늦었고, 다 늦었다. 그러니 진정한 사랑도 늦는 거라 생각한다. 제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늦더라도 제대로 된 사랑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그런 운명이길 소원한다.
문득문득 선생님의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계속했으니까 안 거다.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안 거다. 지치지 않았으니까 그 열매를 맛본 거다. 지쳐도 계속했으니까 그 순간의 단맛을 볼 수 있었던 거다. 이게 뭐가 될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뭐가 될 거라고 기대를 했다면, 꿈에 부풀었다면, 내 손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재능 없음에 한탄했을 것이다. 쉽사리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계속했으니까. 몸에게 시간을 줬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머리의 말을 몸이 알아들은 거니까. 계속하는 거다. 묵묵히. 계속 가보는 거다. 마치 인생의 잠언 한 줄을 얻은 기분이었다. p219-220
- 김민철 작가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개인적으로 92페이지, 즉 '읽다'의 내용까진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다.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고,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제 2,3장 '듣다'와 '찍다'의 내용은 별로 와닿지 않았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기에 그럴 것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내용을 읽을 때 숨이 턱턱 막혔다. 정통 예술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읽고 싶지 않았다. 그 뒤의 제 4,5장 '배우다'와 '쓰다'는 읽을 만했다. 보통의 재미. 그중 가장을 꼽으라면 역시 '읽다' 부분이다. 버릴 내용이 없다. 다 약이 되고 보탬이 된다.
2019.08.21.
작가 정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