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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정용하 Oct 29. 2019

16. 첫 만남에 여자와 새벽 세 시까지 술을

정용하 에세이



요즘 살판났다. 확실히 사람을 만나니 생기가 돌았다. 혼자 있었으면 더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았을 텐데, 종종 사람들을 만나니 정신이 환기됐다. 머릿속이 깨끗하게 재부팅 되는 느낌. 체력적인 부침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좋은 점이 더 많다. 진즉에 사람 좀 만날걸. 왜 그동안 혼자 힘들어하고 아파했는지, 그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옛 인연을 애써 붙잡을 필요 없다. 새롭게 사귀는 것도 이렇게 설레고 기쁜 일이란 걸,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으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다. 떠나간 인연은 붙잡는 게 아니다. 그 빈자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채울 수 있다. 그것이 쿨하다. 관계의 피로감이 덜하다.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건강한 방식이 있었다는 걸 나는 왜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걸까.     



더는 새로운 만남이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기존 인연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이젠 정착하고 싶어서. 그런데 그러한 욕심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나 혼자 이미 떠나간 인연에 미련을 두고, 기대를 하고,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인간관계의 상처는 새로운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다. 기존 관계에서 온다. 기대하는 바를 상대방이 해주지 않을 때 상처가 생긴다. 서로가 정말 소중한 관계였다면 그런 기대를 애써 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잘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미 기한 끝난 관계를 붙잡고서 상처를 자초했던 것이다. 이젠 그럴 일 없다.     



그녀와 새벽 세 시까지 술을 마시게 된 건 별거 없다. 최근 시작한 영화모임 뒤풀이를 끝내고 같이 들어오던 중에 내가 한 잔 더 하자 제의했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데 살고 있었다. 나는 4호선 숙명여대 역 근처에서 중고등학교를 다 나왔는데, 마침 그녀가 숙명여대를 나왔고 후암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뭔가 연결고리도 있고 기분도 한껏 들떠 나는 기분 좋게 마시자 했다. 그녀는 잠시 내 귀가 수단을 걱정해 주더니 선뜻 내 제의에 응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게 됐고, 그곳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한데 중요한 건 우리 둘이 그 날 처음 만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같다는 것도 뒤풀이 때 알았고 말 놓게 된 것도 두 시간 남짓밖에 안 됐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3차를 제안했고 그녀는 시원하게 그것에 응했다. 뭔가 이상하지만,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흔한 술자리 중 하나였을 뿐. 물론 뒤풀이 때 한껏 알딸딸하게 술이 올라 술김에 제안한 것도 있었지만, 뭔가 그녀는 내 제의에 언제든 응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러했다. 무엇이든 쿨하게 받아줄 것 같은 사람. 첫 만남인데도 그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결혼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세한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술도 취했고, 내 정신 시계는 이미 취침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분명 신나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다. 낯선 여자와 단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오랜만이라, 그냥 그 자체로 가슴 벅찼던 것 같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몇 시간 뒤 나는 조기축구회를 나가야 했으므로 버티고 버티다, 세 시 넘어 술집을 나왔다. 버스 정거장에서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오니 세 시 반. 씻고 옷 갈아입고 하니 네 시였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그녀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다. 그냥 기분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연인으로서의 기대보다 여사친으로서의 기대가 더 크다. 집 근처 사는 여사친을 한 명 만들 수도 있겠다는 들뜬 마음.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그랬냐, 묻는다면 딱히 해줄 말은 없다. 모든 이성 관계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분간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이 이성 친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증일 테니. 그런 사람에게 내가 애써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그냥 사람 간의 만남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녀와 친구 관계가 된다면 기쁠 것 같다. 일단 그녀가 집 근처 산다는 가장 큰 메리트가 있다.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 그러나 아직은 한 번 본 사이라 섣불리 움직이기 어렵다. 어차피 꾸준히 이어질 영화모임이기에 그곳에서 자주 보면서 자연스레 깊어지는 것을 택하겠다. 애써 급할 필요가 없다. 결국 그녀와 친구가 안 된다 해도 상관없다. 세상엔 여자가 많다.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채우면 된다. 떠나간 인연에 연연할 필요 없다. 꾸준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 보면 연인도 생기고, 여사친도 생기고, 기쁜 일도 생기고, 추억도 생길 테니까.




2019.10.29.

작가 정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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