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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정용하 Nov 09. 2019

17. 착착착 씨를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

정용하 에세이



받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 혼자 열심히 씨를 뿌리고 있다. 자고로 씨는 아주 폭넓게, 많이 뿌려야 한다. 어떤 게 온전히 자랄지 알 수 없으니까. 다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라도 온전히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양껏 뿌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다 한 작물이 쭉쭉 자라나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으면 그 친구가 내 짝이다.     



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그러다 결국 그 사람이 나를 바라봐 주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 아름다운 과정을 결코 불신하는 것은 아니나, 그 일편단심은 실패할 위험도 높고 상대방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일이다. 사귀기도 전에 나만 바라본다 생각해봐라. 물론 애초에 상대방도 내게 마음이 있다면 그 정공법이 당연히 먹혀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건 상대방을 막다른 길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냥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면 좋고, 아니면 다른 사람 만나면 되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 훨씬 서로에게 편하고, 관계도 매끄러워지고, 혼자서 과속할 위험도 적어진다. 그러니 씨를 열심히 뿌리자. 폭넓게, 많이. 착착착.     



나만 그런 걸지 모르겠는데 푹 빠진 마음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 많다. '어? 저 여자 궁금한데?', '이 여자 괜찮다'. 이게 단순히 어린 시절 '금사빠' 기질이 남아 있는 것이라 여길 수 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금사빠'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런 일이다. 뭐, 애초에 이성에게 웬만해서 무관심한 사람도 있으니 대부분 그런다고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호감이 생기는 사람이 예전부터 많았다. 그게 사랑이라고 하면 당연히 좀 그렇고, 그냥 '저 여자 괜찮네' 하는 정도. 뭔가 가까워지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순수한 마음. '꼭 갖고 싶다'는 아니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 일종의 팬심이라면 팬심이다. 그런 마음으로 요즘 씨를 열심히 뿌리고 있다.     



'흘린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어차피 흘릴 매력도 없다. 상대방이 내가 좋아한다는 착각이 들게끔 만드는 것이 흘리는 것이라면 나는 그저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일단 더 마음이 깊어지려면 말도 나눠봐야 하고 같이 시간도 보내봐야 하니까. 그래도 혹시나 꼬시는 듯한 인상을 줄까봐, 조심 조심해가며 다른 사람 껴서 만나거나 틈이 날 때만 말을 건넨다. 씨를 뿌린다 해서 그것도 적극적으로 하진 못하는 팔자. 그래도 여러 사람 혼자 마음에 두고 친해질 것 생각하니 그 사람들 의사와 상관없이 나 혼자 들뜬다. 우아, 이렇게나 괜찮은 사람과 친해지다니! (상상임) 스스로도 딱한 모양새이나 그게 뭐 상대방에게 피해주는 일도 아니고,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한 명과 실제 깊어진다면 어찌할까. 요즘엔 하도 연애를 안 한 지 오래돼서 연애하는 느낌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다. 그 어색한 느낌을 또 금방 떨쳐 버리고 단기간 연애에 그치지 않을까, 시작도 안 한 상태에서 걱정되는 것도 참 많다. 지금 생각했을 때 오히려 나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혼자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감정에 좀 더 희열을 느끼고 짜릿해 하고 즐기는 건 아닌지. 사랑을 나눈다 했을 땐 그게 어떤 모양인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 했을 땐 머릿속에서 그 과정이 하나부터 열까지 착착 그려진다. 해본 것만 할 줄 안다고, 경험해보지 못한 그것을 상상만으로 해내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 같다. 결국 오늘도 이상한 결론에 이르렀지만 진짜 결론은 요즘 씨 뿌리는 일이 아주 즐겁다는 것이다. 좀 더 많이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디 뿌릴 데 없을까.     




2019.11.08.

작가 정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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