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에서

감성에세이

by 작가 정용하

일이 끝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한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형, 나와. 맥주 한잔 하자.”

“지금?”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고민 좀 하고 연락 줄게.”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누굴 만나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다. 갑작스런 당일 약속에는 잘 응하지 않는 편이었다. 미리 정해둔 일정이 있는데, 그것이 깨지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평소 같았으면 둘러말하고 거절을 했겠지만, 최근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고 그래도 이렇게 불러주는 동생의 성의가 고맙기도 해서, 동생에게 연락을 주고 집을 나섰다.


초저녁의 여의나루는 꽤 쌀쌀했다.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쳤다. 외투를 챙겨오란 동생의 말이 넌지시 떠올랐다. 요즘 밤에도 더운데 무슨 외투. 하지만 동생의 말이 맞았다. 고집을 세워 결국 하얀 맨투맨 티만 입고 나왔는데, 바깥 날씨가 으슬으슬 추웠다. 동생은 이미 돗자리를 깔고 자리 잡고 있었다.

“오, 왔어, 형. 오랜만이네.”


동생이 얇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돗자리 위에는 과자 서너 봉지와 맥주 캔이 흐트러진 채 깔려있었다. 혼자서 벌써 술 한잔 했는지, 돗자리 바깥쪽에 500ml 캔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한강둔치의 연둣빛 잔디밭 위에는 우리처럼 돗자리를 깔고 있는 무리들이 많았다. 봄은 사람의 몸을 근질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처럼 그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것일 테다. 한쪽에서는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는데 기타연주와 보컬의 은은한 목소리가 공원의 배경음악처럼 낮게 깔렸다.

나는 고즈넉한 공원 분위기에 금방 취했다. 동생은 최근에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런데 그는 참 별걱정도 많았다.


“형,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뭘.”

“여자친구가 나의 어떤 점이 좋아서 사귄 건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꼭 어떤 정해준 룰과 과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생의 경우는 나도 다소 이상하다 느꼈다. 그 여자친구는 동생이 ‘착한 남자’여서 사귀었다고 했는데, 단지 그 이유라면 동생 말고도 ‘착한 남자’는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리지 않았는가. 동생이라서 사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여자의 내적인 이유 때문일 거라 여겼다. 혹 본인의 외로움을 달래줄 한 사람을 찾았던 건 아닐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나의 옆에 있어줄 한 사람.


안타깝게도 동생의 고민을 덜어주지 못했다. 잠시 동안 우리는 침묵으로 그 시간을 대신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그 사이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거센 바람줄기. 그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열 명 정도의 무리.


“왜 나만 먹는 거 같냐.”

“그러니까 누가 지래.”


그들은 돗자리 서너 개를 붙여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술게임이 한창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비추는 그들의 얼굴은 딱 봐도 스무 살 남짓의 대학 신입생들이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듯 목소리 데시벨은 한껏 높아져 있었다. 나는 그만 친구의 고민을 잊고 그들에게 빠져버렸다.

그리고 문득,


쟤네들은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겠지?

여의나루에 있는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이 설레는 한 순간이겠지.

나는 과연 지금 이 순간이 추억으로 남을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란 메모지에 추억을 쓰고 있다. 때론 휘갈겨 쓰기도, 때론 숨결 같이 작은 미세한 떨림도.


어느새 동생도 나의 시선을 따르고 있었다.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쟤네들은 이 순간이 추억으로 남겠지?”

“갑자기 뭔 소리야.”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동생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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