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신입생 시절 나는 꽤나 인기 있는 남학생이었다. 적어도 과내에서는 그랬다. 동기들뿐만 아니라, 11학번, 13학번 고학번까지 '꽤 괜찮은 신입생', '멋있는 오빠'라는 말을 종종 전해 들었다. 사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믿고 있다.
그 시절 나는 새로 접하는 모든 인물, 상황에 대해 열린 마음이었고 도전적이었다. 과팅과 미팅에도 자주 초대받아 종종 참석하곤 했다. 옷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남모를 감수성을 키우며 아는 지인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클럽, 콘서트 등 성인이 되며 접할 수 있는 모든 방면에서의 문화를 접해보았고 생각 없이 즐겼던 것 같다.
넘치는 끼와 패기를 감출 수 없던 신입생 시절 나는 매우 자유분방했다. J와의 인연은 11학번과의 술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학회 선배의 초청으로 참석한 술자리에서 동년배에서 찾을 수 없는 농익은 성숙한 몸매와 외모를 갖춘 J를 만나게 되었다. 진한 화장과 염색한 머리, 굴곡 있는 몸매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외적인 매력에 끌렸다.
대학생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할만한 안주와 술, 과일화채와 처음처럼. 새콤달콤한 과일과 처음처럼의 달달하고 알딸딸한 취기가 더해지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이후 11학번 여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다시 한번 J를 마주치게 되었고 번호를 교환했다. 훗날 알게 되었던 사실이었지만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어 같은 자리를 주선해달라고 여선배에게 부탁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같은 수업에서 마주치며 눈웃음을 교환하고, 카톡을 통해 서로의 두근두근 대고 설레는 마음을 교환했다. 나의 감정은 캠프파이어의 불길처럼 화르륵 타올랐고, 저돌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할 때, 항상 상대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성향은 아마 이때부터였지 싶다. 열정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호감을 쌓아가던 중 그녀와의 연애를 결심하게 되었고, 종각역 노래방에서 케이크와 촛불을 준비한 작은 이벤트를 통해 그녀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는 12년도 1학기의 2호 커플이었고, 아주 짧은 시간에 성사된 연애였다.
J와의 연애를 하며 의외로 장애물이 많았었다. J는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매우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모두가 자연스레 알게 될 연애 소식도 꽁꽁 숨기고 싶어 했고, 교내에서도 죄인처럼 숨어서 몰래 데이트를 했다. 누군가 둘이 있는 모습을 봤다던지, 무슨 사이냐는 추궁을 할 때는 그녀의 부탁으로 그저 '친한 선후배'이라며 둘러댔다. 연애는 당당하고, 솔직하게 해야 한다는 주관이 있던 나에게 J의 이런 요구와 가치관은 스트레스와 상처로 다가왔었다. 뿐만 아니라, 연인관계에 있어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 연락의 형태, 데이트의 모습 등 형식적인 것들에 집착이 강했다. 그 덕분인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J와 함께한 순간들은 무언가의 '형식'과 '의무'에 억눌려 순수한 감정마저 희미하고 자세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J와 나는 술자리를 자주 가졌었다. 학교 밑 주점에서 김치전과 막걸리를 곁들이기도 했고, 그녀가 사는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순대볶음과 소주를 즐겼다. 가끔 서로의 연애관과 진솔한 마음의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그녀의 고정관념에 더 이상의 깊은 대화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점차 진솔한 마음의 교류 없는, 겉치레에 집중한 연애는 자연스레 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나는 그래도 소소한 꽃 선물, 이벤트와 데이트를 계획하며 관계 회복에 노력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내 마음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노력해야 했기에,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빠르게 식어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무쌍 커플이 귀여워 보이지 않았고, 육감적인 몸매는 그저 통통해 보였다. 그녀가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를 감고 오지 않는 날이면 서운한 말로 타박을 하기도 했다. 고혹적인 목선은 그저 머리와 몸을 지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빠른 속도로 식어가며, 툴툴대고 마음에도 없는 부정적인 단어들을 뱉는 나를 어느 날 발견하며 놀랐다. 더 이상 그녀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왜 이 사람한테 상처 주는 거지?"
"내가 뭐라고, 내가 그럴 자격 있나?"
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분명 나보다 그녀의 진면모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끼고, 보듬어줘도 모자랄 텐데. 나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더욱 골골댔으며, 그녀 역시 서운함과 상처만 쌓여갔다. 결국 서로에게 악순환이 되는 인연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한 달여간 그녀를 향한 마음의 정리와 이별을 준비했다. 만남의 약속을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회피했고, 더 이상 먼저 그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짐에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J야 우리 O요일에 만나자. 너랑 할 이야기가 있어."
"아 미안해, 그날 나 약속 있어서. 다음 주에 보자."
그녀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나와의 이별을 회피하려 했다. 이 행동은 무려 2주간이나 지속되었다. 나는 끈질기게 이 관계를 끊어내려 노력했고, 그녀는 이별을 무기한 연기시키고 싶어 했다. 이별을 준비하는 한 달여간 데이트 중 나는 끊임없이 차갑게 식은 진솔한 당시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몇 번의 만남에서 이 사태를 파악하고는 나와의 약속을 미루고, 연락 역시 카톡 이외에는 주고받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의 구차한 변명은 필요 없었다. 구질해지고, 포악스러워져 가는 나와 우리의 관계를 더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싶지 않았다. 과의 선배, 친구들, 동기들에게 헤어지려는 나의 마음과 진심을 터놓았다.
2주 뒤 그녀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슬프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려는 그녀의 목소리.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선배들한테 이야기 들었지? 너도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해."
"응..."
"우리 이만 헤어지자.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우리 그냥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자."
"미안하다. 끊어."
J와의 연애는 이렇게 끝이 났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의 나는 누군가에게 '개차반'이자 '개쓰레기'였다. 욕을 한 바지로 들어도 억울한 게 없을 정도로 모질었고 깊은 상처를 주었다. 당시의 나는 매우 미성숙했고, 부정의 감정을 이겨내는 법도, 상대의 진짜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몰랐다.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도, 받는 법도 알지 못했다. 상대의 외적인 매력에 치중한 연애는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의 스파크로 시작된 불나방 같은 연애는 김 빠진 콜라와 잭 다니엘과 같이 시시하고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했다.
2학년으로 진학하면서 신입생 M.T에서 다시 J를 마주쳤다. 그동안 학교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주칠 때 가벼운 목례로 선배로써의 그녀를, 옛 여자 친구로서의 그녀를 대했다. 그녀는 늘 무시했지만 말이다. M.T에서 그녀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복수하려 노력했다. 버스 안 바로 뒷자리에 앉아 고학번 선배와 술을 주고받고 칭찬세례로 선배의 환심을 사고 그녀의 매력을 한 껏 보여주려 했다. 술자리 내내 아주 열성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고 남선배들의 호감을 사려는 그녀를 보고 '안타까웠다'. 맞다, 어떠한 질투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에 아직 미안함이 너무 컸었고, 내가 그녀에게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구애와 질투작전을 묵묵히 관람했다. 나는 그래도 쌌으니까.
20살의 나, 나는 '미완성'의 불나방. 미성숙함의 결정체였고, 누군가에게는 '쌍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