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사 후에야 저 글귀를 발견했다. 퇴사를 결심하던 패기도, 모아둔 돈도 바닥이 보일 때쯤이었다. 그럴 때 저 문장을 보는 순간 나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는가! 아무 준비도, 대책도 없이 오로지 시간 부자가 되겠다며 했던 퇴사는 그저 괴로운 직장일을 회피하려 꾸민 허세 묻은 핑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저~기서부터 흰 카페트 같은 게 촤르르 깔리기 시작했다. 눈을 껌뻑이며 다시 보았더니 내 앞에 남아있는 백지 같은 시간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더니 백지 위에 용수철이 생기고 쿠션이 생겼다. 엠보싱이 뽀송하게 올라온다. 빨리 몸을 날려 누우라고 한다. 오늘내일할 것 없이 한없이 늘어지게 되는 가장 좋은 조건이 돼버린 것이다.
현실이 그랬다.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눈치 줄 상사들이 없고, 나를 향한 누군가의 기대나 불신 자체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몸은 참 편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괴로웠다.
사실 퇴사의 바람이 분 건 이미 좀 지났다. 요즘은 회사를 그대로 다닌 채 부수입을 내는 게 트렌드가 됐다. 일명 ‘부캐’를 만드는 시대다. 놀면 뭐하니에서 MC 유재석이 유산슬, 유두래곤, 지미유의 이름으로 다양한 일을 하지 않는가. 심리적으로도 안정된다. 무작정 퇴사해서 맨 땅에 헤딩하듯 브랜딩 하다 망하는 것보다, 당장 망하더라도 다달이 들어오는 든든한 월급으로 다시 버텨낼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은 그렇게 N잡이 가능한 플랫폼들이 굉장히 많다.
“퇴사하지 마세요! 퇴사하면 바봅니다.
여러분 어차피 회사에서 영혼 없이 일하잖아요.
그냥 회사에서 영혼 없이 쉬고,
나머지 시간에 브랜딩 하시면 돼요~!”
그런데 나는 퇴사해버렸다. 왜 퇴사 후에 이런 꿀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지 마음이 조급하다. 누군가는 월급도 받고 블로그로 돈도 벌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망한 것 같은데...?
다시 병원으로 출근해서 의사의 오더라도 처리해야지만 내 존재가 다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조급해진 마음부터 다잡는 게 중요했다. 내 사고가 바뀌어야 행동도 바뀐다.
퇴사 덕에 시간은 널리고 쌓였지만 내가 생각한 시간 부자는 그런 내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거나 어디로 돈이 새어나가는지 모르게 재산을 쌓아두는 사람은 부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돈이 많은 상태일 뿐이다. 본인이 직접 경영하고 현명하게 재테크하며 삶을 즐기는 부자들의 삶, 그 생활 자체가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것처럼, 가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경영할 줄 아는 삶 자체가 시간 부자다. 로또 1등이 되어도 어떤 이는 잘 살고 어떤 이는 이 전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남편과 침대에 누워 로또 당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한눈에 세어지지도 않을 동그라미들이 다름 아닌 내 통장에 찍혀있다면? 깜깜한 방 안이라도 서로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게 느껴졌다. 당첨이 되면 누구한테까지 이야기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일단 양가에 얼마씩 따로 떼어놓고 얼마를 우리한테 남기자.라고 띄운 운을 놓은 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긴 그럼, 당첨되면 일 그만둘 거야?"
"아니, 아무리 1등이라도 괜찮은 집 하나 사고 차 한 대씩 사면 금방 바닥나 ~!"
너무 빨리 끝난 환상에 김이 팍 샜다.
그럼 만약 거진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써도 남을 돈이 당첨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물었다. 그는 그래도 사업을 하든 뭘 하든 일을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맨날 놀고먹기만 하는 인생은 재미없지 않은가. 당장 퇴사를 하지 않아도 즐겁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상사가 여느 때처럼 업무에 딴지를 건다 해도
‘그래~ 계속 떠들어라. 너 때문에 내 퇴사 버튼 눌리면 바로 당신 찌르고 관둔다.’
라며 한 귀로 흘려버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이전에 회사에서 얼마나 구박받았길래 열등감에 차 이런 상상부터 먼저 떠올리는가 할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그런 상상이 나는 짜릿하고 재밌는 걸 어쩌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건 결국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삶의 태도이지 "어떤 상태"이냐가 아니다. 로또에 당첨되어 돈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현재와 다르건 출발선이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건 똑같다. 집이 생기고, 좋은 차가 생기고, 옷이 좀 더 세련되지는 것뿐, 회사를 때려치우더라도 결국 창업을 해 이윤추구 활동을 하는 것은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저 부자인 상태가 아니라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까? 무얼 할까? 하는 계획을 슬기롭게 짜 내길 원한다.
다시 내 앞의 광활한 시간들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내 앞의 거대한 매트리스들은 게으르게 누워 뒹굴거릴 함정이 아니었다. 마음껏 밟고 용수철처럼 뛰어오를 나만의 환경이 펼쳐져 있던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확보된 진정한 나의 시간이 있어야 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퇴사하지 않아도 짬을 내어 브랜딩 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 환경을 벗어났으니 내 환경의 긍정을 끌어내면 된다. 나는 이미 그 많은 시간이 있었다.
앞으로는 나의 이 바뀐 사고로 어떻게 그 백지의 시간을 채웠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준비되지 않았던 퇴사였기에 시행착오가 많을 예정이라 더 ‘효율적’으로 채워야 했다. 다시 말하면 ‘더 빠르게 효과적인’ 대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