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가 늘 낭만적이지는 않지요

쿠바 한 달 살기 8.

by 무대가리

쿠바에 1달 이상 있는 외국인은 반드시 비자 연장을 해야 한다. 25달러를 주고 구입한 여행자 비자로는 1달밖에 체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장 절차가 좀 까다롭다. 필요한 너덧개의 서류를 준비해서 직접 이민센터에 들러야 한다. 묵고 있는 까사(호스텔)의 영수증, 25 CUC(미화 25달러) 짜리 우표, 여행자 보험, 입국 시 받았던 여행자 카드. 벌써부터 짜증이 난다. 나는 원래 쿠바에 3주만 있을 계획이었으나 아바나에 한 달을 살게 되면서 비자 연장을 해야 했다.


첫 번째, 까사의 영수증. 우리가 생각하는 영수증 이런 거 없다. 그냥 주인장이 아무 노트에다 수기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등을 작성하고 서명해서 쫙 찢은 메모지면 된다. 둘째, 여행자 보험. 보험이 없었던 내 친구는 또 다른 친구의 보험을 포토샵 해서 이름과 생년월일 정도만 바꿔 제출했다. (어차피 확인 안 한다) 셋째, 25 쿡짜리 우표. 이건 보통 은행에서는 구할 수 없고, 우표를 취급하는 특별한 은행에 가야 한다. 우리도 잘 몰라서 그냥 은행에 한참 줄을 서 있다가 우리 차례가 와서야 물어보고 알았다. 여기가 아니구나.


모든 줄 서기에 울띠모(Ultimo)가 필요한 쿠바지만, 이 은행에는 ‘번호표’라는 아주 신식 문물이 들어와 있었다. 물론 쿠바가 점점 변하고는 있다. 예를 들어, 길거리 가판대에서 고기를 파는 정육점 아저씨들이 예전에는 파리를 직접 손으로 날렸다면 이제는 천장에 수술을 설치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리며 고기 위의 파리들을 내쫓는 신식 문물도 생겨난 뭐. 그런 식이다.

P20181127_165115640_8B11EA0E-1919-4A23-8D96-11391C514D77.JPG 아, 수술 아니고 페트병으로 하는 곳도 있다.


서류를 다 갖추었으면 이민국에 가야 한다. 토요일은 오전에 업무가 끝난다길래 부랴부랴 이민센터에 갔다. 직원 한 명이 용무를 물었다.


“어떤 업무 하시려고요?”

“비자 연장하려고요.”

“네, 그럼 이쪽에 줄을 서세요”


평소처럼 “울띠모?”를 찾았다. 앞사람을 확인하고,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울띠모’를 찾을 때 우리가 울띠모라고 표시해 줬다. 그 뒤로 우리 셋은 번갈아가며 자리를 맡았다. 1시간이 지나고 우리 차례가 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비자 연장이요.”

“그건 주말에 안돼요. 평일에 오세요.”


하하. 쿠바 공무원께서 오늘 안 된다고 하시는데 별 수 있남. 돌아갔다가 평일에 와야지. 이 정도는 이제 화도 안 난다. 집 가는 길에 맛있는 거나 사갑시다! 시장에서 장을 봤다. 시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봉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당연히, 여기도 울띠모를 걸어야 한다.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주머니가


Chino, aquí, aquí!

(어이 중국인! 여기야 여기. 여기 줄 서야 돼.)


라고 하신다. 쿠바 사람들이 우리 치노, 치나(중국인) 하는 거 하루 이틀인가. 평소였으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은근 스트레스였는지, 일일이 대응하고 싶었다. 그들 보기에 최대한 무서운 표정으로 (ㅡㅡ? 이런 느낌) 소리 질렀다.


Quién es Chino?

(누가 중국인이라는 거야?)


아줌마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너네”라고 했다. 으. 쿠바 사람들 저 “아무것도 몰라요” 하면서 어깨 들썩이고 양 손 위로 올리는 포즈 정말 얄밉다. 아무튼, 내 손바닥만 한 500원짜리 대왕 아보카도, 30원짜리 바나나, 쪽파, 고추처럼 생긴 작은 피망 요런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을 기약해야지.


P20190226_182327503_2D6812D5-B3F8-4ED4-BF44-65C625B6B0AD.JPG photo credit @chastar92

월요일. 이민센터는 평일 8시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우리 셋은 7시가 조금 넘어서 나왔다. 출퇴근 시간에는 ‘마끼나’(합승택시)가 잘 안 잡힌다. P5번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요금은 인당 고작 20센트, 우리 돈 10원..! 도착해서 지난번에 줄 섰던 곳에 울띠모를 걸었다. 아, 드디어 하는구나 생각하며 30분을 기다렸다. 오지랖 넓은 쿠바 아저씨가 “외국인은 여기 아닐 텐데?”라고 했다. 안에 들어가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여행용 비자 연장은 이쪽이 아니고, 뒤편으로 돌아가면 있는 사무실이라고 했다. 그곳으로 가니 비슷한 만큼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는 새롭게 울띠모를 걸었다.


1시간쯤 기다렸을까, 우리 차례가 도저히 올 생각을 안 해서 사무실 입구를 서성거렸더니 직원이 창문을 열고 먼저 물어봤다.


“비자 연장하려고요?”

“네.”

“의료보험 증명서, 25쿡치 우표, 까사 영수증, 여행자 카드가 필요해요.”

“다 갖고 왔어요.”

“아, 그럼 여권을 주세요.”


여권을 다 걷어가고는 지금 진행 중인 사람이 끝나는 대로 불러줄 테니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앉아있었다. 친구의 아이팟으로 게임도 하고 스도쿠도 하는 사이, 누군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또 다른 친구는 빨간 공과 초록공이 만나도록 다리를 이어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미 300탄이 넘어가서 난이도가 꽤 있어 보였는데도 곧잘 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가져온 물도, 바나나도, 체력도, 인내심도 바닥을 보였다.

1시간 반이 흘렀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 꾸벅 졸던 그 친구가 직원을 쪼아보겠다며 나섰다. 스페인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바디랭귀지와 표정의 리얼함 만큼은 세계 어디서나 통할 친구다. 창가에서 아까 그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직원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러더니 또


“의료보험 증명서, 25쿡치 우표, 까사 영수증, 여행자 카드가 필요해요.”

“다 있다니까요.”

“아, 그럼 여권을 주세요.”

“여권도 아까 다 드렸잖아요.”

“아! 맞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처리 중인 사람 바로 다음에 해드릴게요.”

....


그 상태로 1시간. 더 이상 아이팟의 배터리가 남아있지 않아 게임도 못 할 때, 친구가 다시 나섰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직원들이 바빠서 안 부른 게 아니란다. 그냥 선풍기를 쐬면서 노가리 ㄲ.. 아니,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강하게 항의한 친구 덕분에 드디어 사무실에 입성했다. 비자 연장 절차는 빨리 끝났다. 한 삼사십 분 걸리는 업무였으면 억울함이 좀 덜했으려나. 우리 앞에 앉은 공무원은 모든 작업을 에이포 용지에 수기로 진행했다. 컴퓨터가 있긴 한데 아마 장식품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으로 2분 만에 끝낼 일이 손으로 하니 10분 걸린다. 내가 제일 먼저 비자 연장이 승인되어 여권을 받았다.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했다. 그래 이건 정말 축하받아 마땅하다.

P20181025_013036000_71435F97-4671-4479-B847-B7E8FAD955AF.JPG

쿠바 기차를 타고 15시간 여행을 했던 지난번 이후, 다시 한번 시간여행하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빠른 나라에서 온 사람은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느린 나라에 적응하기 어렵다.

쿠바는 여행지로서 매력이 많지만 여기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날 오후에는 동네 마트에 갔다. 닭과 햄을 사려했을 뿐인데 각각에 울띠모를 걸고 20분씩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울띠모, 울띠모!!! 울띠모에 이골 날 때 내 차례가 왔다. 햄도 스트레스다. 수입산 햄을 사 오라고 했는데, 옆에 아저씨한테 “이거 수입산이에요?” 물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햄이야! 먹어봐.” 하질 않나.


쿠바의 여유로움은 그립지만 그건 내가 철저하게 여행자로 남을 수 있을 때 이야기다. 여유로움의 다른 말은 ‘모르쇠’ 혹은 ‘속 터짐’ 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운 정 많이 들었는지 류준열 님과 이제훈 님이 쿠바 여행하는 ‘트래블러’를 보다 보니까 그립기는 하다. 모르쇠와 속 터짐도 모조리.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땐 왜 위염이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P20190402_005322000_38871885-563B-420E-8393-3996A698996F.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쿠바에 오거든, 말레꼰을 따라 달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