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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Feb 22. 2019

쿠바에 오거든, 말레꼰을 따라 달려보세요.

쿠바 한 달 살기 7.

중남미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독 쿠바에 끌린 이유는 뭘까.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호기심, 카리브해, 흥 넘치는 사람들, 아날로그 세상, 이런 큰 이유도 있지만 자잘한 매력도 많다. 멕시코만을 따라 길게 늘어진 아바나의 ‘말레꼰’ 해변이 그랬다.


말레꼰은 날씨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바람이 약하고 맑으면 선명한 푸른빛의 카리브를 만날 수 있다. 이런 날에는 저녁 대여섯 시에 말레꼰 위로 지는 해를 따라 생기는 석양이 압권이다. 물 색깔은 퍼런데 하늘은 닿으면 곧 녹아버릴 솜사탕처럼 수줍은 분홍빛을 띤다. 파도는 잔잔하다. 아바나에 와서 고요한 말레꼰 만 본 사람들은 이곳에 굳이 둑을 만든 이유가 뭘까, 생각하게 된다. 해가 지면서 바다의 반대편, 올드 아바나에는 주홍빛 전등과 하얀 백열등의 불이 차례로 들어온다. 도로 위로 분홍빛, 빨간빛, 에메랄드빛 올드카들이 관광객을 싣고 달린다.

Malecon, Habana, Cuba (photo credit @chastar92)

조금 시원하다 싶은 날에는 파도가 강하게 친다. 두 블록 멀리서부터 둑을 넘어 올라오는 파도를 만날 수 있다. 둑을 따라 드리워진 바닷물의 자국이 부서져가는 파도의 생생한 소리와 만나는 이런 날, 마음은 더 설렌다. 둑방에는 사람들이 물자국을 피해 앉아있다. 자리 선택을 잘해야 한다. 둑 넘어까지 파도가 치지 않는 곳, 양옆으로 세차게 몰아치는 파도의 소음과 적당히 섞여 적당히 감성적인 수다를 마음껏 떨 수 있는 곳. 안전지대. 맞은편 호텔에는 와이파이를 찾아온 사람들이 쭈그려서 핸드폰을 본다. 1분, 1분, 떨어져 가는 인터넷 카드의 시간이 안타까워 더 소중한 시간을 보낸다.


태풍이 오거나 바람이 아주 세찬 날에는 말레꼰에 차량이 통제된다. 도로 위를 달리는 올드카도 볼 수 없다. 이런 날, 파도는 인간을 무시하듯 가볍게 둑을 넘어온다. 신이 난 파도는 팔 차선 도로의 반대편, 호텔 입구까지 쳐들어온다. 말레꼰을 걷던 이들이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는다. 물벼락을 맞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거린다. 이런 날씨를 기다렸다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말레꼰 도로를 혼자 걷는 기분, 아바나에 고작 며칠 있어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횡재다.

Malecon, Habana, Cuba

말레꼰에는 언제나 악사들이 있다. 쿠바가 아무리 개방되고, 3G가 들어와 집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나라, 밤낮으로 건물이 세워지는 나라가 된다고 한 들 말레꼰 악사들은 연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낮, 밤 할 것 없이 관광객이 몰려 있는 곳이면 어디든 악기를 들고 찾아온다. 어색한 영어로 말을 건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타를 퉁기고 온 몸을 흔들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때, 온 힘을 다해 그들의 동작을 제지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돈을 내야 한다. 쿠바의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해 준 고마움에 팁을 준다면야 괜찮지만 배낭족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 바로 “노 그라시아스!”를 외치며 조금 매몰차게 외면한다. 반응이 없으면 악사들은 흥을 아는, 혹은 돈이 더 많은 다른 여행자들을 찾아 떠난다.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많다. 쏠, 쁘레지덴떼, 아바나끌룹, 이런 이국의 술과 저렴한 치킨 안주를 먹으며 낭만에 한껏 취해 있을 때, 알아듣기 어려운 스페인어로 구걸을 하는 사람이 다가온다. 행색이 초라하지만 자신감 하나는 최고다. 손가락으로 1을 표시하길래 수줍게 1 모네다(50원)를 건네면 이거 말고 다른 것 달라며 “One CUC!"(1200원)을 요구한다. 노뗑고디네로(돈 없어요)는 방해받지 않고 말레꼰의 낭만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필수로 익혀야 하는 스페인어다.

El Morro, Habana, Cuba

이 말레꼰을 따라 조깅을 하고 싶었다. 아침마다 뜨거운 쿠바 햇살을 받으며, 살갗이 꺼멓게 변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생산적인 것들만 생각하며 평생을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에게 흘러가는 대로 마음껏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스트레스임을 알면서도 말레꼰을 달렸다. 쿠바에 남았다.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꼭 생산적이지 않아도, 마음껏 게을러져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깨달음 같은 걸 얻지 않을까. 그래서 말레꼰을 예찬했다. 아바나를 선택했다.


해변을 달리다 보니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올 법 한 아저씨들이 말레꼰 둑 위에 서서 낚싯대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시가를 피우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잔잔한 바다 어딘가 유영하고 있을 물고기들이 미끼 물기를 잠잠히 기다리는 풍경. 아무런 수확이 없어도 정말 괜찮아 보였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본다면 누구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같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긴, 헤밍웨이는 그 와중에도 부지런히 생각하고 기록했으니 대작을 남겼겠지. 모르겠다. 일단 나는 좀 더 게을러도 괜찮을 것 같다.


어느새 보라색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작은 아이 한 명이 “나 잡아 봐라!” 하며 내 주변을 함께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달리던 걸 잠시 멈추고 소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술래가 바뀌더니 아이는 “거기서!” 하며 나를 쫓아왔다. 나는 속도를 늦추어 잡히는 포즈를 취했으나 아이는 나를 잡지 않았다. 왜 더 달리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잠시 뚱한 척하다가 다시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이가 따라 돌았다. 여전히 “거기서! 내가 꼭 잡을 거야!”라고 말했다. 누가 술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Malecon, Habana, Cuba

조깅의 끝에는 쿠바의 개방을 상징하는 커다란 크루즈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 배를 타고 아바나에 왔다. 쿠바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하는 배와 같았다. 어떤 쿠바 사람들은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기적인 여행자의 입장도 그렇다. 쿠바가 멋진 나라가 되고, 쿠바노들이 지금보다 잘 살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말레꼰은 지금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그해 가을, 말레꼰에는 낭만이 있었다. 말레꼰은 구석구석에 보물을 숨겨놓고는 여행자들이 스스로 보물을 찾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쿠바에 가거든, 이것저것 다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덤벼들지 마시길. 다른 것 조금 덜 보더라도, 하루하루 분위기를 바꾸는 말레꼰 속에 혼자 있어 고독도 느껴보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도 나눠 보면서 아바나의 보물을 꼭 발견해 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해적 방송 / 박정대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송.
...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줘     
Malecon, Habana,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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