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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강자를 충실히 대변한다

by 무대가리

어떤 목소리는 과도하게 대표된다. ‘청년’이 그렇다. 언론에서 말하는 MZ세대, 그러니까 영끌해서 주택을 산다거나 윗 사람에게 할 말 하고 워라밸을 중시하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와 대/공기업 사무직에 취업했거나 그런 곳에 취업을 준비중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엔 목숨 걸고 현장에 나가는 건설노동자 청년도, 보호 사각지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내쳐지는 특성화고 실습생도, 고졸 이하의 학력자들도 없다.


‘성평등’도 마찬가지다. 너무 당연한 권리를 얻기까지 여성은 오랜 시간 투쟁했다. 여성의 권리가 반짝 올라간 시점에는 항상 누가 죽거나 다쳤다. 남초 집단에서 내부고발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성폭행을 폭로해야 했다. 술집 화장실에서 ‘여성이라는’이유로 살해당해야 했다. 아동을 상대로 한 거대 규모의 디지털성폭력 카르텔이 드러나야 했다.


반면 남성의 권리는 굳이 누가 죽지 않아도 민주주의라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올라갔다. 선거에서 남성들의 표심이 떠나면 정치권은 알아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 선거에서 2-30대 남자 표심이 보수당을 향했더니 여야 할것없이 이대남을 잡자며 공약을 쏟아낸다. 모병제, 여성 징병, 여성가족부. 이런 단어들은 그때마다 반짝 소환된다. 반면 4.7 재보궐선거에서 20대 여성이 대안정당 후보들에게 15%의 표를 줬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힌다. 젊은 여성들이 왜 양당에 등을 돌렸는가 주목하는 정치인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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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정당과 단체에서는 20대 남성들이 왜 화가 났는지를 너 나 할 것 없이 궁금해한다. 남성의 감정은 여성의 감정보다 더 쉽게 주목되고 더 빨리 해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일까.
(권김현영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민주주의가 강자의 입장을 얼마나 충실히 대변하는지가 보인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인식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정치인은 많지만, 왜 여성들이 그런 인식을 갖게 됐는가 하는 구조적 문제를 들쑤시는 정치인은 없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무섭다. 역차별 운운하는 소리는 솔직히 역겹다. 그만하면 된 것은 없다. 여성 연예인은 밤 늦게 귀가하는 것이 무섭다고 밝히는 것만으로 논란이 된다. 여성운동선수는 숏컷을 했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내리 따내도 욕을 먹는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커뮤니티발이긴 하지만..) N번방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악마들이 감옥에 들어간 것 말고 바뀐 것이 없다. 텔레그램을 피해 다른 매체로 옮겨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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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을 두고 스트롱맨들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진짜 스트롱맨은 어떤 사람인가.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난민 유입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우려하는 국민들을 향해 말했다. “겁먹지 마세요. 독일은 강력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대선 후보는 으레 예능에 출연해 편안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우리 현실에서 메르켈은 너무 막연한 기대일까.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추종자를 어린이로 만들기 위해 열을 올린다”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이다. 울며 떼 쓰는 이들에게 사탕을 쥐어주는 일은 그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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