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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11. 2024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홍콩에 가고 싶어 졌다

홍콩여행기 [프롤로그]

All the leaves are brown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ey (and the sky is grey)


화장실 청소를 했다. 영화 <중경삼림> OST ‘California Dreaming’ ‘몽중인 들으면서  청소를 하면  귀찮던 일들이 즐거워진다. 영화와 음악의 효과는 엄청나다. 욕실세정제를 변기와 바닥에 뿌리고, 스펀지와 솔을 이용해 한참 닦아내면서  노래들이 흘러나왔는데, 마치 주인공 왕페이가  듯한 느낌.


홍콩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충 .. 느낌은 비슷함..


90년대 홍콩 영화가 좋다. 입문은 <첨밀밀>이었다. 코로나가 절정이던 2020, 요리고 뭐고 새로운 취미들에 발을 들여놨다 빼다가, 해리포터를 다시 정주행 했다가, 도저히   없어서 고등학교 때 배웠던 중국 노래 ‘월량대표아적심 ‘첨밀밀 떠올렸다.  노래가 삽입된 영화 첨밀밀이 궁금해졌다. 그리고는, 마침 넷플릭스에  왕가위의 <아비정전> 봤다.


그 뒤로는? 홀린 듯이 왕가위의 <해피투게더>, <중경삼림>, <화양연화>를 연달아 봤다. <패왕별희>를 통해 장국영의 매력을 뒤늦게 배웠다. 내 또래 친구들 중 일부는 알았지만, 대부분 무관심한 영역이었다. 늘 그랬듯, 남들이 잘 모르는 취미를 발견했을 때 뭐라도 된 것 같은 그 기분이 좋았다. 쉽게 말해 왕가위 ‘뽕’에 취했다.


첨밀밀 최애 장면


스토리도 뚜렷하지 않은 그 영화들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중경삼림>만 봐도, 임청하와 금성무가 나오는 1부 내용은 처음 볼 땐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같은 유치 뽕짝 대사들의 향연이다. 그나마 양조위, 왕페이가 나오는 2부는 OST가 좋고 스토리가 있지만, 그 마저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남의 집 몰래 들어가 청소해 주는 이상한 내용이다. 처음 봤을 때 그 충격. 영화 내내 “뭔가 재밌는 게 나오겠지!?” 하며 끝까지 봤지만 결국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근데 영화가 다 끝나니 <중경삼림> 앓이가 시작됐다. May 1의 잔상이 계속 떠오르고,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몽중인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왕가위의 작품들은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서 보고 또 보는 영화가 됐다.


중2병 스러움의 최고는 <타락천사>


홍콩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 건 2024년 8월. 중경삼림이 나온 지 30년 뒤의 일이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 전까지, 아니 출국 직전까지도 30년 전 영화 촬영지를 돌아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쓰잘데기 없는 데 돈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여행준비라곤, 블로그를 통해 찾아본 <첨밀밀> <중경삼림> <타락천사> 촬영지들이 전부였으니까. 맛집도, 카페도, 숙소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다. 홍콩이 뭐로 유명한지, 홍콩 사람들의 주식은 뭔지, 이런 기초적인 정보도 생각하지 않은 채 비행기 표를 먼저 끊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고 했다. <중경삼림> 나오는 Midnight Express 이미 편의점이   오래라고 했다. 범죄의 소굴이었던 청킹맨션은 홍콩 정부에서 열일을  어느 정도 멀끔하게 정비가 됐단다. 무얼 보러 가야 할까.


이런걸 보러 갔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에 꽂힌 경험이   사이 없었다. 브런치 글을 2 동안 쓰지 않았는데  사이 결혼을 하고 이직을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꿈에 그리던 직장에서 하게 됐다. 결혼을 하니 가장 좋은 친구가  옆에 어서 시름 따위 스며들 틈이 없었다. 20대 내내 INFP 따라다니던 우울감 같은  거의 누그러졌다. 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안정적인 삶에 접어든 걸까.


당연히 지금의 삶이 훨씬 행복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에 다시 꽂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홍콩이었고 홍콩 영화였다. 그것도 90년대. 정말 쓸데없지만 쓸데없는 무언가가 가끔 그리웠다. 대학생  쓸데없이 남미에 꽂혀서 스페인어를 미친 듯이 배우고 남미로 떠나기도 했으니까. 그런 감정과 시간을 잠깐이라도 다시 맛보고 싶었다. 이제는 뭘 할 때 시간이 낭비되고, 반대로 뭘 할 때 채워지는지 너무 잘 알아버렸다. 좋게 말하면 안정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안주.



배낭을 가져갈까도 고민했다. 배낭여행은 20 시절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영향을 쳤다. 하지만 30대의 여행은 같을  없다. 주어진 시간은  이틀의 연차 주말을  3박 4일. 그때처럼 돈을 절약할 필요도, 사서 고생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집에 배낭이 없다. 그때 쓰던 배낭은 이미 곰팡이가 슨 지 오래였고, 결혼을 하며 모두 갖다 버렸다. 낭만은 적당히. 결국 캐리어에 굴복했다.


숙소는 어찌할까. 우리 나이  여행이란 대부분 혼자 침실을 쓴다. 홍콩의 호텔을 알아보다가, 아니 정확히는 블로그 리뷰들을 대충 훑어보니 홍콩 호텔은 가격이 비싸고 비좁단다. 기왕 비좁을  그냥 도미토리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친한 친구분께서 흔쾌히 혼자 여행을 허락해 주셨기에 가성비 있게 6 도미토리를 골랐다. 그땐 도미토리에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동행도 구했으니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일박에 3  밖에 안 하지만 중심가 침사추이에 있는  가성비 호스텔을 선택했다.


영화가 끝나고서야 그 의미를 곱씹게 되듯이, 홍콩 여행이 끝나고서야 영화와 일기장을 뒤적이며 몇 자 적어보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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