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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ug 31. 2017

사람 구실

을 하려면 기계가 되세요

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고3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일부 대학의 수시 전형 중에 ‘적성고사’가 있는데 이 시험을 전문으로 준비해주는 학원이다. 적성고사는 사실상의 본고사이다. 대학별로 문제를 출제하며 수능과 유형이 비슷하나 훨씬 쉽다. 다만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르게 국어, 수학, 영어를 풀어야 한다. ‘ㄱ’ 대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60분 동안 국어 20, 수학 20, 영어 10문제를 풀어야 한다. 고득점을 하려면 수학에 20분 이상을 할애할 수 없다. 아이들한테 부끄러워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스무 문제를 다 풀려면 30분이 걸린다. 참 마음에 안 드는 시험이다. 주어진 문제를 보자마자 공식에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 있는지, 여기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묻는다.


아이들에게 20분을 주고 모의고사 하나를 풀게 한 후, ‘국어’ 파트의 문제를 구경했다. 역시나. 문학 부분에서는 (가)와 (나), 두 개의 시가 주어졌다. 두 시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1분 안에. 그래야 합격이 쉬워진다.  


학창 시절부터 우리는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풀도록 훈련받았다. 소설이든 시든 주관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지문에서 이끄는 대로 기계적 문제 풀이를 통해 정답만 잘 고르면 됐다. 그렇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세뇌당했다.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인데 마치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 공부해야만 사람 구실 할 수 있는 것인 냥 여기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려면 국어든 수학이든 한 문제라도 더 맞혀야 했고, 시의 단어 하나하나가 개인에게 갖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시인이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 외우고 (가) 시와 (나) 시의 특징으로 옳은 것을 잘 짚어내기만 하면 됐다. 소설을 읽을 때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빠르게 파악하고 주제를 정확하게 골라내면 그만이었다.


예전에 과외하던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쌤, 저는 국어영역을 풀 때 제 생각을 너무 많이 개입시켜서 풀어요. 지문에서 나온 대로만 해야 점수가 잘 나올 텐데..”

이 친구는 자연계 고3이었고 나와 수학을 공부했지만 인문학적 소질도 다분해 보였다.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그래. 나도 같은 이유로 이과를 선택했어. 그런데 그거 아니? 글을 읽을 때 자기 주관을 개입해서 읽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야. 글을 비판적으로 보는 태도가 틀린 것처럼 보이는 건 교육 시스템이 잘못된 거지 네 잘못이 아니야. 어떤 책을 읽든 네 생각을 많이 개입시켜서 읽어야 해. 다만 지금은 사회가 원하는 획일적인 답을 찾아주자. 아쉽겠지만 그래야 국어 점수도 오를 거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겠지?”


마찬가지로, 지금 일하는 학원에 늘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이 한 명 있다. 내가 풀어준 풀잇법이 훨씬 간단하고 빠르지만 자기가 푼 풀이법을 보여주며 이것도 맞는 방법이냐고 묻는다. 분명 맞다. 어쩔 땐 참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적성고사는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빨리 치고 빠져야 하는데 저렇게 풀다가는 다른 문제에 손도 못 댄다. 이 학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신의 창의성을 버리고 획일화된 풀이를 따라야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수월해지겠지? 그래야 사람 구실을.. 더 잘할 수 있는 걸까?


나야말로 요즘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다. 휴학생 신분으로 집 앞 카페에 가서 공부할 때 사 먹는 커피 한잔 값이 아까워 엄마 카드를 긁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요즘만큼 하고 싶은 것들에 여유를 갖고 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


일례로 소설 <이방인>이 새롭게 다가왔다. 작년에 누군가가 자기의 20대에 <이방인>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말한 걸 듣고는 민음사에서 나온 빨간 표지의 <이방인>을 충동구매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강렬한 첫 문장. 그러나 나는 바빴다. 당시에 책을 읽는 목적은 ‘1년에 50권 읽기’를 이루고자 권수 채우는 게 가장 컸다. 바쁜 학교 생활을 하며 50권을 읽으려면 짬을 내서, 필요한 부분만, 효율적으로 읽어야 했다. 그때 읽었던 <이방인>은 강렬했던 첫 문장 외에 모든 게 별로였다. 머릿속에 소설을 그리며 따라가기에 나는 너무 바빴다.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지만 이 소설이 왜 노벨상 수상작이지, 의문만 들었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1년이 지나자 여유가 조금 생겼다.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빨간 표지의 <이방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놓쳐도 되는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작년에 내가 본 그 <이방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작이었다. 표지에서 시크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알베르 카뮈의 모습이 책 내용과 묘하게 겹쳤다.


다 읽고 나서는 알베르 카뮈의 또 다른 소설 <페스트>를 빌렸다. 명작이다. 이 책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물 찾아보듯 찔끔씩 읽게 되는, 그런 기분을 아시는가. <페스트>가 그랬다.


그 망할 놈의 일 년에 50권, 100권읽기인지 뭔지 하는 거에 얽매여 책을 마구잡이로 읽을 때 보다 지금이 남는 게 훨씬 많다. 단언컨대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교과내용은 적어도 나에게는 쓰레기였다. ‘50권 읽기’ 같은 목표 지향적인 삶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니 주변 사람들, 사물, 책 속의 문장 하나하나가 이토록 와 닿는다. 아 행복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조만간 새로운 목표를 찾아 다시 사람 구실을 해야 할 거다. 문학책만 마냥 펴놓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불쌍한 학생들은 모의고사를 보는 1시간 동안 사람이 아닌 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더 좋은 클라스의 대학에 합격해서 사람 구실 할 수 있으니까. 이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사람 구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아직은 조심스럽다. 어쨌든 하고 싶은 거 해서 밥벌이에 성공했다는 결과와 증거물이 있을 때, 그제야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일 테니 말이다. 적당히 타협해서 이런 말을 해줬다.


"시든 소설이든 빠르게 읽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천천히, 하나하나 음미해야 온전히 공부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적성이든 수능이든 빠르게 해석할 것만 강요 하잖아요? 이건 여러분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시험이에요. 그러니까 재수 하지 마시고, 한번에 척 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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