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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ug 07. 2017

그대 안의 창의성

학교생활기록부 (일명 생기부)에는 주로 학생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담는다. 학생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마지막 날, 종업식 때 마지막으로 생기부를 점검했다. 선생님들이 나에 대해 어떤 평을 내렸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고1 때 담임은 선생님들 중에서도 사이코로 악명 높았다. 대청소 날이었다. 대걸레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을 보더니 대걸레를 잡고 “바닥을 애무하듯이 하란 말이야.”라고 지시했다. 주변에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다. 반 아이들의 SNS(당시엔 네이버 블로그)를 일일이 검열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학교나 선생님에 대한 악평이 쓰여 있으면 교무실로 불러서 대놓고 추궁하기도 했다.


우리 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많은 S라는 친구가 있었다. 1년 내내 반에서 까불이를 담당하며 지루한 수업을 위트 있게 만들어 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S는 정말 창의적이었다. 그의 유머감각이 늘 부러웠던 나는 S와 친해지고 싶어서 표지에 토끼 2마리가 귀엽게 그려져 있는 수학 보충교재를 웃기게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S는 한시간 만에 귀요미 토끼를 얼룩진 살인마 토끼로 완벽하게 탈바꿈시켜놓았다.

그런데 S는 담임과 사이가 안 좋았다. 담임의 기준에서 그는 학업 분위기를 흐리는 문제아였다. 매번 담임과 트러블이 있으면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던 친구였다. 종업식날 확인한 그의 생기부는 욕만 안 쓰여있지 완전 학생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가득했다. 대충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고 주의가 산만하며 면학 분위기를 흐리고..’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S뿐만 아니라 담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수많은 학생들의 생기부는 테러를 당했다.

이제 내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모범생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 정말 그랬다. 선생님 말씀은 무조건 잘 들어야 하는 거고, 학교 수업은 열심히 참여해야 하며 예습 복습은 철저히 해야 하는 거였다. 술, 담배를 포함한 일탈은 있을 수 없으며, 소위 노는 친구들과는 가까이하면 안 된다고 주입받았다. 내신 성적은 나쁘지 않지만 그닥 좋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문, 이과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점수로만 보면 이과를 가야 하는데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일본어가 너무 재밌어서 외국어 공부를 더 심도 있게 할 수 있는 문과도 괜찮아 보였다. 담임이 당연히 상담을 해주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사람, 나에게 정말 별 관심 없었다. 학기초에 눈에 띄게 흰 뿔테를 쓰고 올 때는 “원희는 왜 하얀 안경을 쓰니?”라고 묻는 게 다였다. 진로 상담을 1:1로 받은 적도 한 번 없었다. 40명 남짓한 반이었으니 일일이 만나기가 어려웠던 걸까. 대청소를 하던 어느 날,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원희는 이과를 가고 싶어?” “네.” “왜?” “국어보다는 수학 성적이 잘 나와서요.” “그렇구나. 어렵겠지만 잘 해봐.” 그게 다였다. 나는 그에게 딱히 밑 보일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쳤다. 그리고 내 생활기록부에는 “반 안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나 크게 드러나지 않는 학생임”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냥 시키는 거 잘 해내고 어느 정도 성실한, 그냥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차라리 말썽이라도 일으켰으면 모를까. 그런 일도 없으면서 성적이 엄청 높지는 않은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은 것이다. 어린 나이에 현실을 자각했다. 나는 정말 존재감이 없구나. 내가 이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어라 공부나 해서 여기 있는 모든 애들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길 밖에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내내 학생들 사이에서 존재감은 없지만 공부는 곧잘 하는 학생을 자처했다. 삶에서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지식의 주입과 암기, 그게 다였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Communication & Creativity라는 수업을 들었다. 첫 과제로 자신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Identity Sculpture'(조각상)를 만들어 와야 했다. 이 과제가 그리도 하기 싫어서 철회를 고민하던 중, 문득 이곳까지 왔는데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 한 수업을 들어서 내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감 전날에 부랴부랴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락카칠이 돼있는 돌덩이들을 찾았고, 방 청소를 안 해서 그대로 쌓여있던 스타벅스 컵에 담았다. 제목은 'Tower of Diversity‘. 처음 내 정체성은 태극기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의 한국인이었지만 컵을 뒤집는 순간 소금이 아래 컵으로 떨어지며 다양한 색깔의 돌들이 나타난다. 빠르게 쏟아지는 소금은 교환학생으로 살면서 흘러가는 빠른 시간을, 다양한 색의 돌은 앞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배울 다양성을 상징했다.

수업 당일, 미국 학생들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다. 연필을 모아서 기하학적 물체를 만들고, 나뭇가지들을 묶어 십자가를 표현한 학생도 있었으며 까만 상자 안에 장미꽃과 가시를 넣어 자기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한 학생도 있었다. 이들 앞에서 내 조각상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만드는데 단 1시간도 안 걸렸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내 작품이 학생들 평가에서 1등을 했다! (내 평생 예술 관련 과제에서 1등 해보 긴 처음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흔한 소재였을 모래시계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평을 들어보니 조각상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며 동시에 내용물이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조각상은 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만들어졌기에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이후로 줄곧 스스로를 창의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시키는 건 잘 해내는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창의성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다.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단순한 생각으로 남기지 않고 될 때까지 붙잡아두어 직접 실현 해 보니 그게 곧 창의성이었다. 내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미국 친구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반 안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나 크게 드러나지 않는 학생”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미국 대학교 수업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1등을 한 학생도 나였다. 무엇이 고등학교 때의 나를 ‘크게 드러나지 않는’ 학생으로 만들었을까? 크게 드러나지 않도록 교육하는 시스템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나는 원래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걸까. 모든 학생에게 ‘성적’이라는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서 임무 수행도를 판단해내는, 또한 그 판단이 학생의 ‘대학’ 진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입시제도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나는 그저 시키는 건 잘 해내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을까.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대학에 가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고 말하더라.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창의력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쳐대면서도 정작 학생들은 그들이 가진 예술성을 죽여야만 입시 경쟁에서, 입사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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