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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Aug 03. 2017

이상한 카페, 이상(理想)한 꿈

빈센트 반 고흐

늘 가던 동네 카페에서 늘 먹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았다. 3년이 넘어가는 무거운 노트북의 전원을 연결했다. 이제 콘센트를 연결하지 않으면 작동이 잘 안 된다. 속이 불안으로 타들어간다. 아메리카노가 타는 속을 잠시 식혀줄 순 있지만 마음 깊은 구석까지는 닿지 않는다. 문을 열자 수염이 멋지게 난 신사 한 분이 들어온다. 낯선 얼굴이다.

키보드를 마구 두드렸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애꿎은 커서만 정신없이 깜빡였다. 이 필력으로는 어떤 글을 써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아닌가 보다. 책이나 마저 읽자, 하고 「반 고흐, 영혼의 편지」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 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신가. 학생은 표정이 좀 어둡고만.

아, 안녕하세요. 어쩐지 생산적이지 못한 하루를 보낸 것 같아서요.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매번 허탕만 쳐요. 저는 글쓰기엔 재능이 없나 봐요. 글쓰기 강습이라도 다녀야 하나..

내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점은 글을 쓰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믿음이라네. 그러지 마시게, 학생. 차라리 춤을 배우든지, 누구든 가까이 있는 사람하고 사랑을 해 보아. 학원을 다니느니 차라리 바보짓을 몇 번이든 해 보라고. 공부는 사람들 둔하게 만들 뿐이지.

아저씨는 누구세요?

음.. 글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해야 한다네.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던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해. 그러니 학생 스스로 퇴보하길 바라지 않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구.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껴봐.

허허.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근데 저는 지금 딱히 재미를 느끼는 게 없는걸요. 글 쓰는 게 재밌기는 한데, 어느 이상 쓰려고 하면 너무 골치가 아파요. 하고 싶은 말은 이만큼 많은데 그게 다 말로 표현이 안 된단 말이에요.

참으로 예술은 시샘이 많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요구한다네. 우리가 전적으로 그에 몰두한다 해도 줄곧 자기만 바라봐주기를 고집하지.

아저씨도 예술을 하시나 봐요? 말씀하시는 투로 봐서는 꽤나 유명한 것 같은데.. 왜 처음 보는 얼굴이지... 혹시 그냥 꼰..ㄷ..?

자네가 나를 꼰대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예술가가 될 생각인가?

음.. 아니요.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구요. 글은 취미로 계속 쓰려고 해요. 본업은 아니지만, 평생 해야 할 숙제 같다고 할까요.

예술성을 갖고 살아가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아.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아저씨는 예술가예요?

나는 화가야.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지.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오.. 아저씨 좀 멋있네요. 그리지 않았으면 더 불행했다.. 맞아요! 저도 글을 쓰지 않았다면 더 불행했을 것 같아요. 내 줏대를 갖고 살기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대로 휩쓸리고, 내 꿈을 꾸며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회가 내게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맞추어 살아가고. 그러다가 진정한 나를 잃어버렸을 것 같아요. 사실 요즘, 이게 가장 큰 고민이에요. 졸업을 미루고 휴학하기로 결심했는데, 제 친구들은 거의 다 취직하거나 최소한 취업 준비를 하는 거 있죠.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게 저는 싫어요. 아직도 찾지 못한, 정말 하고 싶은 일, 인생을 통틀어서 정말 이루고 싶은 게 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근데.. 불안해요. 나름 줏대 있게 내 길을 개척하는 유형이라 생각했고 거기에 자부심도 있었는데요. 지금의 저는 이도 저도 아닌,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저 졸업을 미룬 휴학생이에요. 당장 1, 2년을 내다보아도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를 봐. 나는 그동안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탓에 빨리 늙어버렸지. 주름살, 거친 턱수염, 몇 개의 의치 등을 가진 노인이 되어버렸어. 근데 이런 게 무슨 문제가 되겠니? 내 직업이란 게 더럽고 힘든, 그림 그리는 일 아니냐.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 즐겁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비록 내 젊음은 놓쳐버렸지만 언젠가는 젊음의 신선함을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불확실하나마 미래를 상상하며 지낸다. 내 나이가 돼도 미래는 불확실해.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네 결정은 백번 옳아.

아저씨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어요? 음.. 제가 화가를 비하하는 건 아닌데, 어쨌든 대부분의 예술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어려운 삶을 살잖아요. 평범한 청년인 저도 사람들의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에 쉽게 흔들리거든요. 아저씨 나이가 되면 더 하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나는 하찮고 유별나며 유쾌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어떠한 지위도 없는, 있으나마나한 인간으로 보일 것이야. 좋아. 그렇다고 받아들이자. 그래도 나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유별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야망은 슬픔보다는 사랑에, 열정보다는 차분함에 바탕을 두고 있어.

잘 이해가 안 되어요. 아저씨처럼 이상적인 삶을 살기로 선택하는 순간 도태되는 거 아닌가요? 아저씨가 요즘 한국 청년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살다가는 훅 가요. 안 그래도 취업 시장이 좁은데, 사랑이니 낭만이니 뭐니 운운하다가는 패배자가 된다구요. 이런 거예요. 자전거를 타는데, 너도 나도 쌩 쌩 달리니까 저도 속도를 마구 올렸어요.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여기까지 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자전거 속도가 너무 빨라져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무서웠어요.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멈추려고 브레이크를 잡으려 보니 이 자전거는 애초에 브레이크가 없는 거였어요. 아니, 브레이크가 있는데 누구도 제게 브레이크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앞으로 더 빨리 나아가는 법만 가르쳐줬죠.

“나는 이런저런 것을 그리고 싶다”라고 미리 말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면, 아무런 예술적 편견 없이 마치 구두를 만드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항상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겠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때에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었던, 기본적으로 아주 다른 시골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지.

반대로 여러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림을 더 훌륭하게 끝맺고 싶다, 정성 들여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 거야. 나는 스스로를 억제하며 매일의 경험과 보잘것없는 작업들이 쌓여 나중에는 저절로 원숙해지며 더 진실하고 완결된 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믿어. 그러니 느리고 오랜 작업이 유일한 길이며,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온갖 야망과 경쟁심은 잘못된 길이야. 성공한 만큼이나 많은 그림을 망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저는 지금 제 자전거의 브레이크 밟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사실 아직은 속도를 늦추고 페달을 천천히 돌리는 단계지만요. 그래서 무서워요.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쌩 가버리는, 이게 너무 무서워요. 다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방향을 지적하지는 않아요. 저.. 브레이크를 찾을 수 있겠죠?

아저씨가 그 방법 좀 알려주실래요? 느리고 오랜 작업을 견딜 수 있는 법이요. 야망과 경쟁심이 아닌 순수한 열정이 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을요.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잠이 든 걸까.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아있었다. 배경음악으로는 실시간 멜론 차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없었다. 한여름에 빵빵하게 틀어놓은 카페 안의 강렬한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강렬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그 아저씨는 누구였을까. 다음번에 이 카페를 찾으면 또 만날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참고도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2 (예담출판사, 신성림 역)

(고흐 말의 대부분은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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