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있는가?'
전과자였던 잭은 회개를 통해 기독교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은총과 심판의 하느님을 찬양하고 복종하여 구원받고자 하는 잭은 강박적으로 실천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가르침에 모순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교회의 문제청소년을 폭행하는가 하면, 동생을 때린 아들이 다른 팔도 때리도록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신도의 모습이라기에는 단선적인 선악관이다. 심지어 신을 기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통사고였지만 살인을 하게 된 잭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선한 하나님, 악과 고통의 현존이라는 트릴레마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원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자유의 신정론과 교육의 신정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죄를 지어왔던 잭은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을 받고 고통의 감내를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신에 의해 잭은 고통과 고난을 겪도록 선택된 것이고 이것은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소 도덕적, 신앙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잭은 ‘자수’를 통해 지상의 법으로 처벌받지만, 그것만으로 구원받지는 못한다.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단순한 자수와 형사처벌이 아니라 자백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속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못한 채 죄의식 속에서 가족에게서 벗어나 방황하던 잭은 크리스티나에게 행하는 고백과 그녀의 용서 그리고 폴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온다. 잭이 자신의 고통을 모두 신에 대한 책임으로 돌리지 못한 이유는 즉사한 마이클과 큰딸과는 달리 아직 죽지 않았던 크리스티나의 막내 딸을 두고 잭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잭이 신앙을 완전히 져버리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고통스러운 죄책감과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된 자신에 대한 직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모티브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릴 수 있다. 초인은 인류의 공리를 위해 살인에 대한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초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형사처벌을 수용하지만 시베리아로 가서도 진정한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못한다. 그의 죄는 이성과 합리성에 눈이 멀어 신의 영역을 넘보았고, 다른 인간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인 쏘냐의 인도로 진정으로 속죄한 라스콜니코프에게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 지금까지 몰랐던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진정한 구원을 위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야만 했던 것처럼 잭 역시도 진정한 구원을 위해 그를 포용하는 가정에서 격리되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영화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쏘냐의 역할을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결과를 바꿀 수 없으니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범인의 실존을 본후 복수를 갈망하기는 하지만 결국엔 잭을 용서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상속에 있는 성녀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심장이식을 통해 현대식의 부활과 환생의 테마를 보여주는 폴은 크리스티나와 잭에게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는 결정적인 기회의 순간에서 잭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심장이식을 기다리던 교수 폴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던 여자친구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진정한 신앙심의 획득을 통해 구원을 받고 가정으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게 된 잭을 보면 ‘신을 잊었다는 것이 재앙의 근원’이라는 솔제니친의 명언마저 떠오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영화의 결말이다. 크리스티나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임무를 끝낸 폴은 천상으로 돌아간다. 폴이 사라지기 때문에 편모로서 임신한 크리스티나의 모습은 마치 무염시태의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킨다. 한편, 인공수정을 해서라도 폴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던 폴의 여자친구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내린 벌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죄는 폴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의 낙태인 것일까?
영화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캐릭터는 잭의 아내인 마리엔이다. 그녀는 잭과 함께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진정한 신앙심이라기 보다는 가정의 평화와 남편을 위해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남편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잭을 껴안고 심지어는 세차를 해서 증거를 없애는 등 남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가 단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잭이 석방된 이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다. 단지, 그녀는 다른 여느 인간들처럼 이기적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뿐이다. 굳이 <죄와 벌>의 캐릭터들과 비교를 하자면 그녀는 쏘냐가 아니라 끝까지 라스콜니코프의 동생 두냐의 곁을 지키는 라스콜니코프의 친구의 모습과 닮은 것 같다. 러시아 문학에서 유사한 다른 캐릭터를 들어보자면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에 등장하는 루카를 고려해볼 수 있다. 가난과 죽음 등 밑바닥 인생을 사는 등장인물들에게 어느날 루카라는 노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최선을 다해 고통받는 밑바닥 인생 인물들을 위로한다. 그러나 싸친만큼은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루카를 비판한다. 그러나 루카가 떠나고 난뒤, 루카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중 인물들이 루카가 사기꾼이었다고 비난하자 오로지 싸친만이 그는 사기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기 위해 진실보다 위로를 우선시한 사람이라고 변호한다. 크리스티나의 입장에서 보면, 잭에게 자수하지 말것을 애원하는 마리엔은 부정적인 인물이지만 잭과 잭의 아들 딸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최선을 다하는 마리엔을 우리는 비난할 수 만은 없다. 인간세계에서의 죄와 벌 그리고 구원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그리스 정교의 영향권 하에 있어왔던 러시아 작가들이 죄와 벌, 구원 못지 않게 치열하게 고민해 온것이 바로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리스 정교의 세계에서 혁명 이후 이성과 과학, 무신론의 소비에트 시기를 거쳐 21세기 짜르라 불리는 푸틴 대통령의 장기독재 하에서 정치와 종교의 상조를 통해 점진적인 그리스정교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러시아에서 언제나 어떻게 살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다. 러시아인들에게 일상은 언제나 투쟁의 대상이고 고민의 대상이며 가장 개인적인 영역인 사랑조차도 고귀한 이념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또다른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이반 일니치의 죽음>에서도 비슷한 모티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예술가에서 사상가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후반부의 작품인 <이반 일니치의 죽음>의 주제는 비교적 명확하다. 남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아온 이반일니치의 일상은 끔찍해고 예고 없이 닥친 죽음 앞에 그는 왜 하필 그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절규한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그를 대하는 게라심을 보고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고통의 수용 끝에 평화를 찾는다. 톨스토이를 거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안톤 체호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의 이반 부닌까지 그들은 지속적으로 <나>의 <진정한 삶>에 대해 독자들을 고민하게 한다. 영화와 관련지어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삶을 실천하여 진정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영화의 제목인 <21 그램>은 마지막의 폴의 입을 통해 의미가 밝혀진다. 사람이 죽으면 사라진다고 하는 무게, 그래서 사람의 영혼의 무게가 바로 ‘21그램’이다. 가볍다고 하면 매우 가벼운 무게라고 생각되는 21그램이지만 우리의 영혼에게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21그램은 우리가, 신과 존재론적 심연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육체와 육체의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고 그에 따르는 벌을 받지만 우리에게 영혼이 있기에 진정한 구원과 나의 영혼, 타자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를 적용해보고자 한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비슷하게 행복하지만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불행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은 제각기의 이유와 상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신에 대한 원망과 불신보다는 진정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고민에 더욱 시간을 들여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