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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ernalYoung Aug 03. 2018

영화 <인생>

; 하오하오

인생; 하오하오


    이제는 영어보다 중국어를 배워야한다는 말도 나온지 오래되었다. 중국시장으로 진출하려는 한국기업들도 많아지면서 취업시장에서도 중국어 구사가 가능한 인재를 선호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기업들의 중국시장 진출이 만만치 않으니 현지사정과 문화에 밝은 중국어 가능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중국인과 평생을 가까이서 살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중국 바이어나 거래처들이 미팅에서 하오하오를 연신 얘기한다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힘들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마음에 들거나 일을 추진할 계획이 있으면 오히려 짐짓 관심없는체 하고 트집을 잡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좋지 않은데 하오하오라고 했을까?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인생>에 나오는 주인공 푸꾀이는 중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역사적 시기였던 4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살았던 인물이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가 하면40년대 국공내전이 발발했을 때는 군인으로 끌려가고, 대약진 운동때는 아들이 죽고, 문화대혁명때는 딸이 죽는다. 그저 소박하게 ‘평범한 인민’으로 ,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지만 그의 인생의 수많은 굴곡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중국 근대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다양한 정치적 사건들이 그의 인생에도 굴곡을 만들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책만한다. 딸이 죽은 것은 만두를 많이 먹은 의사에게 물을 준 자기 잘못이라고. 좋은 날이 올거라고 믿는 주인공 부부는 계속해서 되뇌인다. 살아야지, 그래도 살아야지.  

    인생에 일어난 비극에 분노하거나 고난을 만들어낸 정치적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 주인공을 보고 고난을 묵묵히 이겨내는 중국 민중의 강인한 힘,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분명 인생의 다양한 역경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살아준 당시의 중국인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후손들 역시 그들이 힘든 시기를 버텨준 것에 대해 감사해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공산당에 대한 냉정한 시선과 홍위병에 대한 비판적 묘사 때문에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분명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장이모우 감독이 말하고자 한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이머우는 은유적으로 권력비판을 하는데 능한 사람이다. 국민당원을 아버지로 둬 문화대혁명 시기 혹독한 경험을 한 그의 개인적 배경이 영화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푸꾀이는 잘살기 위해, 좋은 인민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역사의 풍파 앞에 국가와 당 혹은 공권력은 푸꾀이라는 개인을 도와주지 않는다. 잘 살기 위해 조는 아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냈는데 아들이 관료의 차에 치여 죽고 만다. 심지어 과거 동료였던 관료를 마음놓고 미워할 수도 없다. 그 관료조차 후에 자본주의자로 낙인찍혀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딸은 노동자와 결혼시키고 결혼식때 마오쩌동도 존경하며 성실히 살았지만 의사가 없어 출산하다 죽었다. 잡혀간 노의사를 데려온것도 사위가 개인적으로 했어야 했다. 나의 실존과 생존의 문제는 나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공산당도 마오쩌둥도 홍위병도 푸꾀이가 동의하거나 선택한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푸꾀이는 도박에서 자신의 집을 가져간 찻집 주인이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지주 판정을 받고 결국엔 총살을 당할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집을 잃지 않았다면 총살당한 사람이 자신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계속되는 희비교차에 안심할 날이 없다.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상식이란 도대체 무엇이엇을까? 아마도 푸꾀이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공동체 공통의 감각을 최대한 빨리 인지하고, 사유하는 힘을 억눌러야만 했을 것이다. 각자도생의 길에서 사회가 변화할 수록 사람들간의 경험의 교집합은 달라지고 공유될 수 있는 부분은 자꾸만 작아진다. 시민사회와 의사소통, 협업의 담론장보다는 선동과 처벌만이 발생한다.  이런 인생을 산 푸꾀이가, 중국인들이 배운 것은 아마도 바로 하오하오가 아닐까? 예상치 못하게 닥치는 고난과 역경에 되도록 휘말리지 않고 그래도 좋게좋게 생각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날이 오기 위해서, 이제 중국인들인 진심으로 하오하오라는 말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객관적인 상식을 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주관적인 합의와 소통을 통해 타당한 ‘옳음’과 ‘좋음’을 형성해야한다. 또한 이미 공유되는 상식을 개인은 의문시하고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평범하디 평범한 푸꾀이는 인생의 시련 속에서도 하오 좋은 날이 올 거야, 살아야지라고 한다. 이제는, 하오하오의 속뜻을 볼 필요가 있다.


‘소통과 화합이라는 진부한 상식을 되새기며’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1298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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