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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ernalYoung Sep 09. 2018

특별한 일상을 위하여

이스탄불 여행기

“날이 저물 무렵이다. 똥 같구나. 이 강력한 말로 우리는 인간의 모든 비참함을 앞에 놓고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구나. 그래서 나는 그말을 반복하기를 즐긴다.
 똥. 똥.”


내가 사랑하는 작가 알랭드 보통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플로베르가 한 말이라고 한다. 염세주의자 혹은 비관주의로 알려진 플로베르는 언제나 이집트, 그리고 낙타를 동경했다고 한다. 노르망디 중산층의 오만에 비해 낙타의 우울하고 볼품없는 모습을 더욱 진실되게 느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분명히 그의 일상에서 염증을 느꼈던 것이다. 성적이 나왔다. 똥 같구나. 인턴에 떨어졌다. 똥 같구나. 똥. 똥. 하던 나도 남들은 취업준비로 정신없는 4학년 겨울방학에 나의 일상을 떠나 이스탄불로 갔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 한류 때문에, 혹은 역동적인 서울의 모습에 서울을 여행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러나 정작 서울 출신인 나에게 서울은 행복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서울은 언제나 나에게 초조함과 낙오된 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Saade Kahvalti

나는 이스탄불에 한달을 머물기로 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서 이렇게 오랜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서 도망쳐온 상태였고 그곳에서 일상의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이렇게 풍족한 곳에서 제국이 탄생하는 구나.” 이스탄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1월에 이스탄불을 방문한 나는 배가 터지도록 오렌지를 먹을 수 있었다. 터키에서는 오렌지가 너무 많아 소먹이로도 준다고 했다. 참 단순하지만, 과일덕후인 나에게 값싸고 신선한 과일은 행복 그 자체였다. 서울의 비싼 과일값이 언제나 내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과일 뿐 아니라 거리마다 시장마다 가게마다 넘쳐나는 빵, 과일, 야채들은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벌통 채로 파는 진짜 꿀, 킬로 단위로만 취급하는 요거트, 어린아이 만한 커다란 빵. 심지어 디저트 가게에서도 바클라바를 킬로 단위로 판매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터키어로 커피를 카흐베(Kahve)라고 하는데 영어 커피의 원형인 단어이다. 커피 마시기 전 이라는 뜻의 카흐발티(Kahvalti)가 바로 터키식 아침식사이다. 가루 째로 주는 터키식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거하고 여유롭게 먹는 터키식 아침식사 카흐발티는 나를 터키에 계속 머물고 싶게 했다. 서울을 비롯해 바쁜 현대인들은 아침식사를 거르는 것이 미덕인 마냥 여기곤 한다. 그러나 다섯 종류의 치즈, 두 종류의 올리브, 신선한 꿀, 여섯종류의 빵, 네가지 종류의 과일 잼, 따뜻한 달걀 요리 등을 식탁 가득 차려 놓고 튤립 모양의 잔에 계속해서 따뜻한 차를 부어 마시며 즐기는 여유로운 아침 그리고 오후의 시샤(물담배)가 바로 술을 마시지 않는 터키 사람들이 인생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풍족한 아침을 핑계삼아 가족, 친구와 마주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니 가족들과 연인이 보고싶었다.

모스크와 과일과게

아침을 먹은 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라는 베벡 스타벅스를 가기 위해 소화도 시킬겸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걸었다. 탁심광장에서 이어지는 그 길은 오전 햇살에 아름다운 오르타코이도 볼 수 있고 터키 서구화의 상징이자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눈을 감은 유럽식의 돌마바흐체 궁전도 지나간다. 이번 여행 이전까지 유럽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나는 터키의 유럽식 건축물들에 쉽게 매혹당하곤 했다. 참고로,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은 동양식 건축물인 톱카피 궁전이다. 엄청난 양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곳에서 강력하고 화려했던 술탄의 모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는 톱카피지만 겨울에 찾은 대리석 건축은 너무너무 추웠다. 비라도 오면 나는 눈물콧물, 오들오들 떨며 카페를 찾아 헤멨다. 제국의 심장이었던 이스탄불의 풍족한 인적, 물적 자원은 명성이 자자한 그랜드바자르만 가도 느낄수 있지만, 나는 길거리를 걸을 때 살이쪄 늑대만큼 비대해진 들개들이 길거리에 늘어져 자고있는 모습을 보며 가장 크게 느꼈다. 같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개를 싫어하고 고양이를 예뻐하지만 이곳에서는 들개들도 남아도는 음식들을 얻어먹고 거대한 몸집과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베벡 스타벅스

 베벡 스타벅스는 나를 감탄시켰다. 좁은 자취방을 탈출하기 위해 서울에서 맨날 가는 스타벅스지만 그곳은 3층 건물이 통유리였고, 눈 앞에서 아시아와 유럽 대륙 사이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감상할 수 있었다. 눈부시게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바쁘게 일상을 사는 터키인 비즈니스맨들 곁에서 나는 반짝이는 보스포러스 해협과 평화로운 선박들을 바라봤다. 또하나, 여행내내 느낀 거지만, 이스탄불의 매력은 도시의 언제 어디서나 통통한 갈매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내에서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옆에서 총총거리는 갈매기와 바다내음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때 나는 내가 내 일상의 불안을 마주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상을 찾아다닌 것이다. 나는 호텔이 아닌, 현지인의 집에서 카우치서핑을 했고 클럽이나 술집이 아닌 카페를 갔으며 파토스 보다는 에토스를 느끼고자 했다. 육식과 과식이 일상화된 터키 식문화를 피해 비건인 팔라펠 식당에 갔더니 주인아저씨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슈퍼 비닐봉지들을 보고선 누가 봐도 이국적인 나에게 터키어로 말을 걸었다. 내가 터키에 사는 사람인줄 알았다고 했고, 띄엄띄엄 영어로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이유를 얘기하고 싶어했다. 수다쟁이 아저씨에게서 도망쳤지만 혼자 여행에 심심했던 나는 <순수 박물관>을 가기 위해 걸으면서 작가 김영하가 읽어주는 다비드 브르통의 ‘걷기예찬’과 체홉의 ‘입맞춤’을 들었다. 장교를 애태웠던 하룻밤의 우연한 입맞춤을 체홉은 농담이라고 표현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자의 원형은 순례자라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인간은 걸으며 사유한다고 하였고, 나는 의사였던 본업에서 기인한 체홉의 시니컬함과 관찰력, 유머가 마음에 들었다. 체홉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안나 옆에서 안나보다 두배나 나이많은 행복하고 오만한 구로프가 수박을 잘라 먹게 하고, 구로프가 안나를 그리워 하며 괴로워할때도 작가로서 그 앞의 아름다운 얄타의 자연환경을 묘사하는데 체홉의 일관적인 태도가 묘하게 방황하던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햇살 눈부신 오르타코이

이스탄불이 낳은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은 케말의 퓌순을 향한 집착적인 사랑을 다룬 책 <순수박물관>의 집필과 동시에 박물관 <순수박물관>을 구상했다. 파묵은 “우리의 일상생활은 고귀한 것이며, 이와 관련된 물건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수박물관은 동명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되살릴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물관에는 1950년~2000년 사이 의 일상생활을 설명하는 다양한 물건들, 사진, 의상, 영상 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이 오브제들은 거의 모두 소설에 언급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의미에 서 기자회견에서 파묵은 ‘공간보다는 오브제들이 더 부각’되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당시 책도 읽지 않고 박물관에 방문한 내가 이스탄불에 다시 와야 할 이유 1순위로 <순수박물관>을 꼽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살았던 이스탄불의 소리, 분위기, 감정을 정확하게 구현해낸 그의 섬세함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등장하자 마자 첫 작품인 “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와 낡은 세면대인 “나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결심했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도시의 운명과 함께한다고까지 말한 오르한 파묵이 묘사한 순수박물관 속의 이스탄불은 한달째 이스탄불에 머물고 있는 내가 케말과 퓌순이 어딘가에 살고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퓌순이 좋아했던 닭가슴살 푸딩, 케말과 퓌순이 함께 산책하던 갈라타 다리, 매일 아침 맞이하는 시미트 장사꾼 등은 나도 이스탄불의 일상을 공유하는 느낌이었다.  똥 같은 일상에서 도망쳐 왔던 나는 이스탄불에서 서울의 일상을 살아갈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순수 박물관 "그녀에게 청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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