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la S. Chudori의 『집』 (Home)과 Linda Le의 『중상모략』 (Slander)를 중심으로
앞서 두 작품을 망명 디아스포라의 경험으로서 명명했으나 이것은 균질적인 이주가 아니다. 각국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결정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국외추방, 베트남에서는 봉쇄라는 차별적인 권력의 전략과 형태가 디아스포라의 망명지에서의 대응방식, 고향에 대한 태도와 감정에 차이를 가져왔다.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당원은 수백만명에 달해 중국, 구소련에 이어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했다.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반미, 반소련, 비동맹 노선을 주창했으나 1965년 공산 쿠데타 시도(9.30 사건)을 계기로 친미 성향의 군부가 집권하였다. 군부는 쿠데타 배후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살상을 저질렀고 새롭게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친미,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33년간의 독재를 했다. 2017년 10월 17일에는, 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 20세기 최악의 대량학살로 꼽히는 인도네시아 반공 대학살을 미국이 알고도 묵인했음을 보여주는 1963년에서 1966년 주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 외교문서가 공개되었다. 수하르토의 ‘신질서기’ 동안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살을 피해 인도네시아인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권, 과거 식민주의의 역사로 인해 인도네시아인 이민자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네덜란드 등지로 떠났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난민들이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로 갔는데 특히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이다. 그중에서도 대다수는 네덜란드로 갔는데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교에서 네덜란드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비교적 쉽게 국적을 얻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스스로를 네덜란드인이나 프랑스인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계속하여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들은, 대략 서로 알고 있었지만 돈독한 유대관계나 공동체를 형성하기 보다는 서로 냉담하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실 망명자들은 1965년 이전 불화가 있었던, 동질적이지 않은 여러 단체들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시 적대적이던 소련(USSR)과 중국을 모델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부에서 부과된 “공산주의자”라는 낙인과 난민의 지위만큼은 공유했다.
네덜란드에 있던 Asahan, 스웨덴에 있던 Ali Chanaiah 와 그의 부인, 프랑스에 있던 Umar Said 등의 망명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어로 글을 써왔고 이것은 인도네시아의 Sastra Exile (망명문학)을 형성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점은 서사의 특징이 모든 정치적 사건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브론 아이딧 (Sobron Aidit)는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프랑스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의 천 페이지를 쓴다. 주로 1965-66 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고 "사건"의 도살, 투옥 및 기타 모든 비극적 인 결과에 대해서만 경미하게 언급한다. 망명문학(sastra exile)의 두번째 특징은 그들은 과거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었든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제거하여 인도네시아 국민으로 인정받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권한을 돌려받고, 모욕 없는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치 망명자들은 거의 집착적으로 집과 인도네시아 사회로 돌아가기를 바랐고 그것이 창작활동의 가장 큰 동기였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시기에 파리에 정착했던 소수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있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같은 서유럽임에도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연 인도네시아 레스토랑을 거점으로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 파리에 정착한 아니타 아이딧(Anita Sobron Aidit) 등 인도네시아인들의 실화에 기반해 탄생한 레일라의 『집』 (Home)은 1965년 사건과 1998년을 주된 배경으로 하여 아버지 세대와 딸 세대를 거쳐 인도네시아인들이 여권이 만료되어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지 못한 이후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보여준다. 소설을 통해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해외 인도네시아 망명자들과 잊혀졌던 역사에 대해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전쟁은 197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을 탈출하는 엄청난 수의 난민과 ‘보트피플’을 야기했다. 이들은 미국, 호주 및 독일, 체코, 프랑스 등으로 이주하여 ‘비엣키우’라는 거대한 재외베트남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그런데 1975년 사이공 함락이후 분단되었다가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 모국으로 인해 프랑스를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에 정착한 베트남인 디아스포라는 내부의 분열 및 디아스포라 개개인의 혼란,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복잡한 정착국과의 관계 등을 겪어 왔다. 1977년 중반 급격히 늘어난 베트남난민의 발생 배경은 일반적으로 중월분쟁과 베트남의 화교방출로 설명된다. 1975년 통일을 이후 남베트남의 사회주의화를 추구하고 있던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친중세력인데다 경제적으로 남베트남의 자본주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새로운 통일국가로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 안으로 포섭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트남노동당은 1977년 화교에게 중국국적을 버리든지 추방을 감수하든지 하라고 경고했으며 화교의 활동무대였던 상업의 사회화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념, 소련과 캄보디아에 대한 외교정책 그리고 영토 문제 등으로 베트남과 중국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베트남과 중국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1977년에서 1979년 사이 이시기 베트남 난민의 발생 원인은 일차적으로 중월분쟁이며 장기적으로는 베트남전쟁과도 관련된다.
작가인 린다레 역시 이 시기에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963년에 태어나 14살에 어머니, 3명의 언니와 함께 ‘보트피플’로 프랑스로 이주한 린다레는 작가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 1.5세대이며 그동안 자전적 소설(autobiography)을 써왔다. 예를들어, Leslie Barnes(2007)은 린다레의 <Voix: Une Crise>를 프랑스의 베트남계 이민자였던 린다레의 자전적 경험의 재창조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Mong Hang Vu-Renaud는 프랑스의 베트남 이민자에 관한 저서(refugies vietnamiens en france;interaction et distinction de la culture confuceenne)에서 그녀가 "difficulté à être"(되는 것의 어려움)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이민자의 집단으로의 동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교 체계를 따르는 아시아계 이민자의 맥락에서,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개개인의 행동을 지시하기 위한 사회구조를 영속시키는데 필요하다. 개개인은 공동체 밖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어린 세대는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창조하려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도는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미래 사이에서 교섭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지배적 문화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위치와 관계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가 가지고 있던 전통문화의 통합과 영속에도 영향을 준다. 1993년도에 쓰여진 『중상모략』 (Slander)는 그녀의 다섯번째 소설이자 그녀에게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린다레는 베트남에서는 다낭과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학교를 다녔고 1977년 프랑스로 온 이후로 줄곧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 게다가 린다레 스스로가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의 난민 이주 물결에 속해있지만 스스로를 프랑스의 베트남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동일시하지 않는점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중상모략』 (Slander)의 중심 화자는 여성 주인공이다. 여성 주인공 역시 작가 개인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기 전 프랑스로 이주한 아시아계 이주민이다. 그 영성 주인공은 가족의 형상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고 그 과정에서 오래전 여자 형제와의 근친상간으로 프랑스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삼촌과 만난다. 서사의 대부분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의심스러운 삼촌과 혼란스러워 하는 조카의 관계 묘사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작품과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시 말하면, 모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인 인도네시아인들의 망명은 국외로의 추방이었던 것이다. 반면, 망명 이전의 베트남인들은 국가 내부의 봉쇄의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가 내부의 봉쇄의 상황에서 박해를 받던 사람들은 망명의 형태를 통해 국가 밖으로 탈출하는 비자발적 이주를 한 것이다. 즉, 끊임없이 타자를 생성해내고 타자에 대한 배재와 차별, 소외를 통해 구성하는 민족-국가의 권력행사 방법이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추방과 봉쇄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디아스포라 의식이 생성되는 망명의 시초에서 추방과 봉쇄라는 차이는 각 디아스포라가 누구와 어떻게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망명 디아스포라는 모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정착국에서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인도네시아인들은 프랑스 사회보다 모국의 대리자인 인도네시아 대사관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강제추방 당한 이들은 고향에 대해 강한 상실감을 느끼며 반드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국에서의 낙인에 정착국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베트남인들은 정착국에 동화되고자 하나 떠나온 곳(모국)으로 인해 사회주의자가 아닌지에 대해 정착국에서 경계와 의심을 받는다. 정착국에서 베트남인들이 사회주의화된 모국을 ‘탈출’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프랑스라는 민족-국가에서 인종과 문화, 국적이 교차하는 가운데 배제되고 내부의 적으로 상정된다. 망명 디아스포라가 경험하는 망명과 고향은 이와 같은 정치적인 관계에서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