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존경한 학자 아가시는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신의 피조물들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면 거기서 도덕적 가르침이 나오리라고 믿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구상한 ‘신성한 사다리’ 개념으로, 생물에 순서를 부여하여 올바르게 배열하면 신의 의도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진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기만적인 희망이자, 신적 지위에 대한 열망이었다.
계통수를 그려내려는 열망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수많은 신들의 가계도를 텍스트로써 그려내는데, 역시 우열이 부여되어 있다. 헤시오도스는 제우스에게 ‘신들의 왕’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왕이 현명한 말을 하도록 인도하는 칼리오페를 아홉 뮤즈 중 으뜸이라고 노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전학자 브루스 스넬은 헤시오도스를 일신론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로 여긴다. 권력 구조의 체계화가 주는 쾌감과 정갈한 분류표에 안착함에서 오는 소속감은 인류 사상의 기원부터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연구실다운 연구실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호시절에 태어난 분류광 데이비드는 대지진에 의해 자신이 다이너마이트와 독극물을 사용하여 포획한 후 분류해 두었던 물고기들이 자신이 부여한 이름을 잃었을 때, 어떻게든 다시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아가미 사이에 보존제를 머금은 물고기의 피부에 명찰을 직접 꿰메고, 흩어진 사체에 끊임없이 물을 뿌리며 부패를 막는다. 혼돈의 공격을 막고 자연을 거스르며 지배하고 이해하려는 욕망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재편하면서 사물의 영혼을 없애면서 존재론적 평등을 이룩했지만, 동시에 종교와 과학을 서로 다른 영역에 집어넣으면서 과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주종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기준을 설정해 체계를 부여하는 지배욕은 언제나 인류와 함께 해 왔다. 보잘 것 없고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인간의 기준으로 명명하고 기능을 주고 타자화하는 일은 시각중심주의의 사디즘적인 구체화이자 신적 행위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용납하지 않고, 오로지 사다리의 뼈대 중간중간을 채우기 위해 직진하며 수집욕을 불태우는 물고기의 신 데이비드의 완고하고 자신있는 낙천성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저자의 어린 시절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결별의 아픔을 위로하는 데에 어찌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그 스스로 데이비드를 의심할 때조차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분류학에 대한 집착과 발전주의 찬양의 이면에는 환경 파괴와, 우생학과, 범죄 연루 혐의가 숨어 있다. 데이비드는 ‘자연의 사다리’라는 약에 취해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했으며, 그 약효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자신의 환경을 철저하게 설계하고 조립한다.
밀러가 아버지에게 들은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는 사실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나는 나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단히 자존감이 높아 보여서 부럽기까지 했다.) 이러한 일화와 더불어 자신의 일탈로 인한 남성 애인(내지 썸남)과의 단절은 꽤나 충격이 컸는지 책의 중후반부까지 계속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싸하기 짝이 없는 데이비드를 변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너무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위로하고 싶어 한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자기기만의 “긍정적” 착각으로의 역할만에 집중하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경고를 “낮은 자존감”을 위한 치어리더들의 응원이라고 일축하며 비아냥거린다.
글의 후반부에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관점, 그를 서술하는 어조나 생각의 방향이 틀어지지만, 사실 밀러가 찬양하는 그 순간순간 데이비드의 모습에서도 이미 독단적인 인간중심주의자, 나아가 인종주의자가 될 싹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이런 학자의 태도를 통해 치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행위는 사실 밀러가 데이비드보다 자연의 ‘장엄함’에 덜 매료되었고, 물고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수집의 욕망이 부족했기 때문에 드러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것일 뿐, 어떠한 커다란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는지 잘은 모르겠다. 너무나 강력하게 도취되었던 밀러의 과거가 나의 배려심을 훼손했는지,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냉담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개인사가 정교하게 얽힌 에세이에는 손이 더욱 가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