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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녀ㅣ이혜진OT Jan 12. 2019

아빠의 영원한 단짝

아빠의 영원한 단짝 이옥희 여사

  나의 간병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바로 나의 엄마 이옥희 여사이시다. 우리 가족은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다. 평범한 아빠와 엄마가 아니셨으니 말이다.


  평범이라는 국어사전의 뜻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의 어근인데, 우리 집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고 색달라도 너무 달랐다. 


  엄마는 세 살도 되기 전 빙초산이 든 사이다병을 마셨다. 죽을 거라고 내버려 둔 아이가 엄마의 아빠인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신 후, 기적처럼 살아나셨단다. 지금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자기를 대신해 생을 마감하신 거라고 굳게 믿고 계신다. 그렇게 엄마는 목숨은 구했지만 빙초산을 먹은 후유증으로 들을 수는 있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엄마도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큰 오빠와 두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엄마의 집은 안타깝게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말도 못 하는 엄마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했다. 말이 식모 살이지 말도 못 하는 어린 식모... 얼마나 힘들고 고생했을까... 나는 사실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엄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다. 엄마의 나이는 1953년생이신데 사실 이 년도에는 웬만하면 한글은 배웠을 시대다. 엄마가 아직까지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9살쯤 되던 해 엄마의 큰 오빠이자 나의 외삼촌께서 엄마에게 염소 두 마리를 지켜보라고 했단다. 9살 여자아이가 염소를 본다면 얼마나 볼까? 결국 염소는 잊어버렸고, 화가 난 외삼촌은 엄마의 뺨을 때렸는데, 그때 충격으로 말문이 트였다고 한다. 참으로도 슬픈 이야기이다.  


  말문이 트였다고 해도 9살에 학교를 갈 수 없어, 계속 배우지도 못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울산 방어진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래서 나의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한 번도 책을 읽어주신 적이 없다. 그림책만 보게 하셨고 나는 글도 그림으로 알고 신데렐라, 콩쥐팥쥐... 모든 동화는 그림으로만 이해를 했다.


  먹고살기 바빴다는 이유로 엄마는 글을 계속 배우지 못했다. 이제야 글을 배운다고 노인학교도 가보고 했지만, 엄마의 굳은 머리를 쓰기에는 힘드셨나 보다. 지금은 또 배우는 것을 중단하셨다.


  그런 아빠와 엄마가 만났으니 우리 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엄마는 식모살이의 성장 배경이 있어 그런지 흔한 경상도 말로 쎄다. 지금도 세월이 느껴질만큼 쎈 이미지가 외모에 풍긴다. 아빠와 함께 딸을 키우기 위해서는 세질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런 센 여자이기에 아빠에게 엄마는 고분고분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술을 먹고 오는 날이면 엄마는 아빠보다 더 날뛰었으며, 엄마가 술을 더 잘 드셨으니, 내가 느끼기에는 월남전보다 더 큰 전쟁일 때가 많았다. 아빠가 재떨이를 던지는 날에는 엄마는 텔레비전을 망치로 깨는 여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지만, 배운 것이 없는 나의 엄마는 남자의 술버릇을 이렇게 고쳐질까 하는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알코올 중독의 딸바보 아빠와 센 엄마 밑에서 그래도 행복은 있었다. 나는 외동딸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성장했다.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이 환경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좋은 집안이 아니었지만 딸 하나만큼은 지극히 보살피며 사랑을 듬뿍 주셨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잘 자라서 남들 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는 것도 부모님의 배경도, 돈도 아닌 그저 조건없이 나에게 준 사랑이었다. 




  이옥희 여사의 간병 시작


 바쁜 오후의 일상,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시간 나의 사물함에서 자꾸 진동소리가 들린다. 쉬는 시간 확인하니 055의 국번으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왔다. 나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양산부산대학교 병원 응급실부터 중환자실을 거쳐 의식을 찾지 못하였지만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어? 왜 병원에서 전화가 왔지?.... 엄마가 있을 텐데?....  

  

불안한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했다. 나는 최대한 공손히  나를 알렸다.

"네. 안녕하세요. 이재봉 씨 보호자 딸인데요."


  "네 저는 이재봉 씨 담당 간호사입니다.
오전부터 이재봉 씨 보호자인 어머니가 안 보여요.
지금 5시간째 보이지 않고, 소변 통도 비우지 않아,
따님한테 전화드렸어요.
환자 분 저렇게 혼자 두시면 위험해요.
어머니와 연락을 취해서 빨리 오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


  세상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몇 번 받지 않으시다 울면서 받으셨다. 울면 서라기보다 술을 드시고 술주정에 가까운 말씀들을 하셨다. 병원에 있기 싫다느니, 영감탱이가 죽지도 않고 저렇게 살아서 애를 먹인다고, 나는 당장 내가 다니던 병원에 사정을 말하고 의정부에서의 생활을 급하게 정리 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래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쓰러짐과 간병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까? 한 동안은 엄마의 얼굴도 보기 싫었지만, 그런 엄마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 힘든 상황을 버티려면 화낼 힘도 아껴야 했다. 아버지는 남들 그 흔한 보험도 가입되어있지 않아 진단비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대학병원에 눈퉁이처럼 불어난 병원비는 참으로 막막했다. 일을 바로 해야 했기에 엄마를 다독이며, 간병을 하게 하고 나는 부산에 있는 병원에 재 취업을 하였다.


  나의 엄마는 간병 초기 도망도 갔던 보호자셨지만, 간병 끝에는 전문 간병사도 최고라고 할 정도에 간병의 달인이 되셨다. 그렇게 엄마의 도망과 함께 아빠의 간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우리 가족은 물러설 때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빠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엄마의 보호자는 나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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