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start.
그해 겨울, 저녁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늘 오는 전화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 엄마.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울면서 말씀하신다.
“진아!! 아빠가 이상하 데이.
집에 오니깐, 침을 질질 흘리고
말도 못 하고 이상 하데이.”
나는 작업치료사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빠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졸업식도 하기 전 부산에서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재활병원 인턴 치료사로 취업을 했다. 2010년 1월 4일 국가고시 합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그렇게 나의 작업치료사의 길은 시작되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게 빠르게 취업을 해야 한다는 환경에 화가 났었던 게 아닌가 싶다. 9년 전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2010년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의 한 해였다. 그 당시 새내기 작업치료사들의 일자리는 경남과 부산지역보다는 경기도, 서울 쪽의 큰 재활병원들이 많았고 취업의 문도 넓었다. 부모님에게 받을 수 있는 여유자금은 없었다. 오로지 내가 가진 것은 아르바이트로 모아 온 70만 원과 건강한 신체가 다였으니 말이다.
취업을 해도 문제였다. 병원에 기숙사가 제공되지만, 기숙사라고 하기보다는 방 세 칸 정도의 25평대 빌라였다. 방 한 칸에 2층 침대가 있고 2~3명이 같이 잠을 잘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숙사도 갓 들어온 신입이었기에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럼, 가진 돈 70만 원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시텔이었다. 고시원 생활이 어떠한지는 임상실습기간 동안 지내왔었기에 대략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인턴의 작업치료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나는 2년 차의 작업치료사를 바라보고 있었고 신졸 작업치료사를 뽑는 구인공고를 내고 있는 시점이었다. 의정부에서의 1년 생활은 시간이 된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에피소들이 많다.
그해 겨울, 아빠가 뇌졸중(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나의 간병생활은 시작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와 딸 사이도 그렇겠지만 특히, 더 애틋했다.
아빠는 전라남도 고흥 풍양면 한동리 4남매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 당시 할아버지가 47세에 아버지를 보신 거니, 늦둥이도 그런 늦은 늦둥이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의 집안은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셨다. 그런 집안의 늦둥이였으니, 애지중지 키웠을 테다. 할아버지의 뜻은 아녔을지 몰라도 아빠는 고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제아였다. 큰 엄마한테 듣기에는 작은 체구지만 싸움도 1등에 중학교 때부터 술통을 끼고 살으셨단다. 나에게는 큰 엄마인 아버지의 큰 형수가 시집을 오고 나서 아버지가 태어나셨으니 진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사고만 치던 아버지는 18세 되는 해 집에 있는 소 두 마리를 팔아 술을 마셨단다. 그 이후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을까? 할아버지에게 죽도록 매질을 당했을까?
아빠는 진정한 사나이셨다. 매질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진으로 월남전 참전을 하셨다. 아빠는 1948년생이니, 18세에 월남전을 다녀오셨으면 1966년도쯤 예상된다. 그 당시 나의 큰 아빠, 아빠의 큰 형은 군인이셨는데 아빠가 소를 팔아넘기고 나서 소식이 끊겨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진으로 월남전을 가겠다고 모여있는 사람들 중 늦둥이 동생이 있었으니, 이미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렇게 들어도 아빠는 꼴통 중에 꼴통이셨다.
그렇게 월남전을 가시고 월남으로 갈 때 입었던 옷이 고흥 집으로 전보가 왔다. 한 번도 뵌 적도, 얼굴도 모르는 나의 할머니는 전보 소식이 아빠의 사망 소식인지 알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아빠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니셨다.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기기도 하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기도 하고, 사람을 시켜 찾아내 잡아오면 또 나가고 그렇게 반복을 하던 중 나의 엄마와 중매로 만나셨다. 아빠가 37세에 32살의 엄마를 만나 38세에 내가 태어났다. 아빠도 엄마도 이른 나이에 나를 낳으신 건 아니었다.
월남전을 다녀온 외상 후 스트레스인지는 몰라도 아빠는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상태로 술에 미쳐있으셨다. 술을 드시지 않을 때는 그런 선비가 없으셨다. 술만 드시면 엄마에게 폭언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아빠의 심리적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빠는 막노동일을 시작하며 배운 철근 일을 계속하셨다. 흔히 말하는 막일이라는 일이다.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일은 새벽부터 나가서 12시간 이상을 일하는 힘든 일이다. 그런 심리적 문제에 신체까지 힘드니, 술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
이런 아빠도 딸 앞에서는 딸바보셨다. 나는 아빠가 매일 술에 취해 있으셨지만, 그 술냄새가 싫어도 아빠와 뽀뽀도 하고 아빠 옆에서 잠을 잤다. 아빠가 술을 먹고 들어와 뻗으면 양말도 벗겨줘, 물도 떠줘, 싫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더 사이가 좋았다. 흰머리가 유독 많이 나고 햇빛에 그을려 새까맣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아빠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빠인데 지금은 나는 건너지 못하는 그 강에 아빠를 보낸 후로는 아빠를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