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rapport)
'라포(rapport)'란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 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다. 라포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삶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관계 중의 하나다. 의사소통을 통해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 관계를 말하며, '다리를 놓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인 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다리를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오늘 칼럼에서 공유하고자 한다.
필자는 작업치료사로 재활과 요양병원에서도 인기가 꽤나 많은 싹싹한 치료사였으며, 이때 실제로 터득한 비결이다. 먼저 노인 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다리를 연결하기 전 떨어져 있는 세대 간의 거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앞서 확인해야 할 사실은 현재 노인 세대의 문화적 배경과 시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요양병원이나 장기요양 기관을 이용하는 노인 세대는 이르면 1920~30년대에 출생한 어르신부터 1940년대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고령사회에 접어들며 노인인구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을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20~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와 할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시대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신 분들이다. 독립 이후에 태어나신 노인 세대들도 편안한 날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고, 4·19혁명, 5·16 군사 쿠데타와 같은 사건들과 함께 이어져 온 독재 정치로 현 노인 세대들은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이 기간 동안 온 국민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게 됐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러한 성장 뒤에는 어려운 여건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피와 땀과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던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눈물이 있다. 또한, 외화를 벌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광부와 간호사들 그의 가족들,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용사들, 모래바람 몰아치는 중동의 사막 지역에서 고생한 건설 노동자들이 우리가 지금 친해져야 하는 노인 세대다.
우리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 보면 먼저 하늘로 보낸 자식들과 남편, 부인 이야기까지 흔히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듣기 힘든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통행금지, 긴 머리와 미니스커트 제한, 대중가요의 노랫말까지 그야말로 자유가 억눌린 국민이었다. 감히 현재의 청년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되지 않는 비상식의 사회였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작업치료사들의 여러 고충 중에서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는 어르신들과 라포를 형성해야 하는데 이제 2~30대 병아리 같은 치료사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활동들을 쉽게 해 주시는 노인분들도 있지만, 흔히 말하는 불통의 노인분들도 꽤 있어 힘듦을 표하기도 한다. 이런 불통의 노인분들을 만나게 되면, 치료사들은 치료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장기요양 기관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근무하는 전문가들이 이 비결을 적용한다면 불통의 노인분들과도 소통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성별에 따라 차이를 둘 수 있다.
필자가 작업치료사로 근무할 때 담당 환자인 할아버지와 높은 라포를 형성했었던 경험이다. 할아버지가 항상 하셨던 말씀 중에 내가 전쟁에도 나가 총알도 피했는데 이 중풍을 못 피해 슨상님을 만나고 있다며, 구수한 사투리로 매일 말씀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신 것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전쟁 이야기와 군대 이야기에 대해 늘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던 그 전쟁 이야기는 실로 영화처럼 재미있었다. 그렇게 매일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우연히 할아버지의 보호자인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할아버지는 군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군미필자였다.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해주셨던 전쟁과 군대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철저히 할아버지에게 계속 속아주기로 했다. 아마도 손녀 같은 치료사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면 치료실에 내려오지 않거나 지금까지 나와 쌓아온 라포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거짓 정보를 눈감아주란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손녀 같은 나에게 매일 군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밤마다 머릿속에서 알고 있는 모든 전쟁과 군대 이야기를 조합해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노인 세대와 라포 형성을 잘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먼저 말씀을 하셔야 한다. 노인들의 문화적 배경에는 아픔과 슬픔으로 한이 맺혀있으시며 요양기관에 있는 분들은 더욱 입이 무거우신 편이다. 무거운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비결 첫째,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한평생을 살면서, 가장 잘나갔던 시절을 회상하게 하고 그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다.
둘째, 첫사랑과 관련해 질문한다. 할아버지들 대부분 첫사랑을 물어보는 질문에 잠시 회상을 하며 소년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사랑 이야기가 영웅담이 되고 그 이야기가 가지를 뻗어 이야기 나무의 가지는 더 튼튼해지고 잎사귀는 풍성해진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는 않다. 할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손녀 같은 우리에게 하면서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자체가 소통이 되고 라포가 쌓이게 된다.
다음은 할머니들과의 라포 형성 비결이다. 할머니들은 할아버지들보다 더욱 억압받고 살아온 대한민국의 여성들이다. 지금의 여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화 속에서 삶을 사셨다. 가슴속 깊은 곳이 아픔과 상처로 문드러져 가는 마음을 꽁꽁 숨기고 살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런 아픔이 많을수록 라포를 쌓고 친해지기는 굉장히 힘들다.
이런 할머니들의 입을 열게 하는 질문 몇 가지 중 가장 실패 없는 것이 있다. 첫째가 바로 자식 자랑이다. 자랑할 자식이 없으면 손주 자랑까지 밤도 샐 수 있을 정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이 방법의 부작용은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할머니들에게는 아픔을 끄집어낼 수도 있어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자식과 손주 자랑이 끝나면 둘째, 시집살이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기가 막히게 할머니들 사이 속사포 랩 수준에 가까운 시집살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실제 사연일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방법 셋째는 뒷담화다. 여자들이 특히 친해지기 위해 서로 협동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법이다. 할머니도 여자이기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금기시해야 할 질문은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던 첫사랑 이야기다. 오히려 역정을 내시기도 하며, 배우자분에 대해 화병이 쌓여 계시는 분들도 많다. 흐지부지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질 수도 있다. 성별에 따라 대화 주제만 잘 정한다면 노인 세대와 깊은 라포를 쌓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음속 깊이 꺼내기 힘든, 또는 나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는 건 큰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 용기가 바로 라포 형성에 핵심이며, 우리는 함께 공감하고 소통을 통해 신뢰감을 쌓아갈 수 있다. 라포는 사람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며, 이 비결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자식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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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울산신문(https://www.ulsanpres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