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D (1952, Umberto D)

<움베르토 Description>

by 늘픔

‘연금은 당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첫 시퀀스는 이 문장을 전제한다. 피켓에는 연금을 올려달란 문구가 적혀있다. 평생 일만 했다는 사람들은 정장을 입고 건물 앞에 모인다. 그러나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경찰에 해산 당한다. 세 명의 남자가 대화를 한다. 그러나 한 명을 제외하곤 집회 참여 이유가 없다. 한 명에겐 연금 인상의 필요 이유가 있다. 그 남자는 움베르토다.


1. 움베르토 녹취록


영화는 관음의 매체다.

영화의 시점은 전지적 시점으로 철저하게 프레임 안과 밖이 분리된다. 우리는 영화 세계에 간섭할 수 없고 접촉할 수 없다. 영화 또한 프레임 밖에 있는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비토리오 데 시카는 영화를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관음이 아닌 관찰을 허락한다. 관음은 벽 너머 다른 세계를 훔쳐보는 행위지만, 관찰은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 결국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는 기존의 극영화를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첫 시퀀스의 자막을 기억하는가. “아버지를 위해 이 영화를 바칩니다.” 결국 아버지와 이 영화는 상관관계의 성립을 전제한다. 아버지는 현실에 있고, 영화는 세계를 담는다. 결국 데 시카의 영화는 현실과 호흡한다. 새로운 세계를 쥐어짜느라 머리를 뜯지 않는다. 데 시카의 영화는 현실에 공존하며, 프레임은 우리의 눈이다. 관음이 아닌 관찰인 이유는 프레임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D>는 세계를 관음하지 않고 관찰한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고 한다. 고전 영화학자은 프레임 속 영화라는 매체를 고정하고 정의했다. 하지만 영화의 태동은 어떠했는가. 뤼미에르 형제가 카페에서 <기차의 도착>이라는 영상을 재생한 순간, 영화는 태동했다. <기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 또한 현실이다.


오랜 극영화의 문법에 데 시카는 균열을 낸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다른 세계가 아니다. 세계 2차 대전의 패배로 무너진 이탈리아 시민의 자화상을 담는다. 그 시발점은 <자전거 도둑>이다. 데 시카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프레임의 세계와 현실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을 프레임에 밀착시키고 벽을 없애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를 보고 관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닌 관찰의 불쾌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시작점은 본인의 시계를 끊임없이 흥정하며 파는 시퀀스다.

노인은 연금만으로 생활한다. 연금은 물가와 연동되지 않아, 노인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와중에 집주인은 월세를 올리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건넛방 하녀 밖에 없다. 모든 프레임이 움베르토에 집중되어 있다. 영화를 통해 관음한다고 보기엔 이 영화는 카메라가 상황을 직시한다. 모든 시퀀스가 프레임 정면에 나서며 관객에게 세계를 직시하게 만든다. 복선, 은유와 같은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움베르토 D>는 영화보단 녹취록에 더 가깝다. 움베르토에 모든 프레임이 맞춰져 있고, 프레임은 움베르토가 머무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장 <희망의 건너편>에서도 보여준 각기 다른 공간에서의 교차 편집은 여기서 이뤄지지 않는다. 작가 시점인데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관찰자 시점이다. 카메라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지만 판단을 내리지 않고 동행만 한다. 움베르토가 입원해 월세에 대해 마리아와 대화하는 시퀀스, 플리크(강아지)의 행방을 묻는 시퀀스는 녹취록이라는 증거로 확정짓는다. 모든 이야기가 프레임에 담기지 않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움베르토 D>의 프레임은 전지전능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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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관하는 시스템


움베르토의 녹취록은 시스템의 방관을 고발한다.

녹취록은 고발 혹은 증거를 목적으로 한다. 목적이 있는 증거물로서 영화는 작동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움베르토는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실패한다. 그리고 놀란 플리크는 움베르토를 멀리한다. 움베르토는 자신의 모든 짐을 내던진 채, 플리크와 프레임에서 멀어진다. 여기까진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가 녹취록이란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 영화는 움베르토의 객사 증거로 사용된 녹취록이다.

이번 달 영화 <움베르토 D>와 <희망의 건너편>은 모두 해피엔딩처럼 끝이 난다. 칼을 맞은 칼레드의 얼굴을 프레임 아웃하며 끝나는 <희망의 건너편>과 움베르토와 플리크가 함께 프레임 아웃하며 끝나는 <움베르토 D>는 희망을 찾아 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방관하는 시스템 앞에서 비참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시스템의 방관에 위기가 시작됐다. <움베르토 D>에서 움베르토는 물가와 연동되지 않는 연금 시스템의 패러독스에 빠진다. <희망의 건너편>에선 칼레드의 고향인 시리아 내전으로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핀란드라는 새로운 국가에서도 국가 시스템은 난민을 허용하지 않고 거부한다.

<움베르토 D>에서 이탈리아는 세계 2차 대전 전후 복구 시기였고, <희망의 건너편>의 핀란드는 외국인 이민에 대한 차별이 있던 시기다. 피렌체의 군인이 등장하고, 망명을 신청한 칼레드가 폭행을 당하고 칼에 찔린다. 군인은 임신 소식에 당황하며 떠나고, 칼레드가 기다리던 버스 기사는 폭행을 지켜보고만 있다. 군인과 버스 기사는 국가 시스템으로 치환하여 보면 피해자를 방관하기 바쁘다.


움베르토는 시스템의 방관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 연금 인상 시위에 참여하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싸게 팔며(책과 시계), 먹을 것을 줄여가며 집값을 내기 위해 돈을 모은다. 처음 연금 인상 시위를 제외하면, 모든 책임이 본인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움베르토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움베르토는 무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전제조건은 연금인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시스템은 고통을 개인에게 전가하며 방관한다.

움베르토는 국가에 충성했다. 파시즘 시대에 공무원이었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초라한 연금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시스템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장점은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고, 단점은 부의 격차를 심화시킨다. 움베르토는 노력했지만 시스템은 인정하지 않는다. 몰락한 파시즘의 공무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시스템은 과거의 영광을 누린 몰락한 이를 방관할 뿐이다.

움베르토는 데 시카다. 퇴장하는 움베르토는 네오리얼리즘의 문을 닫은 데 시카다. 데 시카는 네오리얼리즘을 열었다. <자전거 도둑>으로 정점을 찍은 그의 시대는 <움베르토 D>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파시즘 시대에 태어나 파시즘 사상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가 40대에 유럽발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고, 그의 세계였던 파시즘은 몰락했다. 그가 목도한 파시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유입은 네오리얼리즘을 탄생시켰다. 네오리얼리즘의 문을 연 그가 스스로 네오리얼리즘의 종말을 선언하며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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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파시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유입에 적응하지 못한 늙인이의 처량한 뒷모습일 뿐이다. 수위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구세대(움베르토)를 가리는 신세대(아이들)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매체가 아니며, 객사한 움베르토에 대한 증거물이다. 이 영화는 녹취록이며, 사망한 움베르토에 대한 방관한 시스템을 직면하기 위한 것이다.


잘 가요 움베르토, 잘 가요 데 시카. 또 만나진 맙시다. 더 큰 비극을 직면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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