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정처 없는 위치, 예측된 의심, 혼잡된 래퍼런스
난 공포영화를 못 본다.
공포영화뿐만 아니라, 고어, 슬레셔 무비 등 혐오감과 공포에 관한 영화는 거의 못 본다. 이전의 씨네22의 선택 영화 <유전>을 보다, 마지막 장면을 전부 스킵할 정도로 나는 공포영화를 못 본다. 나이가 먹으면서 현실이 더 공포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기괴한 모습이나 잔인한 장면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번 <랑종>은 왠지 영화관에서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기대했던 <곡성>은 개봉 당시 군 복무 중이라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기 때문이다. 믿고 보는 나홍진을 떠나서 영화가 가진 기이한 기운이나 영화가 가진 소재가 궁금했고, 페이크 다큐를 비롯한 공포영화를 극장에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도전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첫 공포영화 극장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경험담을 키워드에 나눠서 짧은 평을 남겨보고자 한다.
1. 개고기
영화 <랑종>에서 밍의 엄마인 노이는 시어머니 사업을 이어받아, 개고기 장사를 한다. 이 영화의 원본인 <랑종의 후예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촬영팀은 노이에게 묻는다. "태국에선 개고기 장사가 불법 아닌가요?"라 묻는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태연하게 답변을 한다. 그리곤 개고기 장사를 계속한다.
아시아권 민간신앙에서는 "개"의 역할은 다양하다. 가장 기본적인 반려동물의 역할부터 집을 지키는 수호신 그리고 하늘과 이어주는 하나의 '사자'로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개"의 대한 큰 역할은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민간신앙 혹은 민속신앙 기록을 보면 개는 늘 집안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한다. 개는 비형체이자 비시각적인 유령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믿고 있다. 가끔 집에서 허공을 보며 짖는 개들을 보면 우리는 "귀신을 보고 짖는다"라고 할 정도로 개의 이미지는 아시아에서 확고하다.
그런 개가 사람의 식용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죽은 개를 식용으로서 파는 행위는 "불법"이지만, 인간은 "행위"를 자행한다. "합법"의 범위에서 "불법"으로 선을 넘는 순간, 개가 악령을 쫓는 "믿음"이 사라진다. 즉, 개를 죽임으로써 악령을 쫓는 행위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하늘신(바얀신)의 사자 역할을 수행하는 또 다른 역할인 개를 죽임으로써, 님의 랑종 역할을 약화시키고 악령이 밍에게 지접 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이가 키우는 "럭키"에 대한 복선이었을 것이다. "럭키"는 어쩌면 밍에게 접신된 악령의 존재에 대해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시아권에서 여겨지는 개의 역할을 보면 밍에게 접근하는 악령의 지접을 지연시키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밍의 마지막 보호를 깨뜨리는 것은 다름 아닌 엄마인 '노이'다. 딸을 죽이는 엄마의 행동. 개고기의 판매를 통해 딸을 지키는 마지막 끈을 놓은 것이다.
2. 눈먼 노인
영화 초반 노이의 남편 장례식에서 밍을 노려보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한밤 중에 밍을 노려보더니 이내 사라진다. 님은 의심하지만 의심’만’ 남긴 채 다음 날이 된다. 아침이 되자 밍을 노려본 할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 할머니는 절 뒤에 사는 눈먼 노인이었는데, 죽기 전날 밍을 노려본 후 다음날 사망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장면이 언급되지 않고 보이지 않아 맥거핀이라 단순히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중반에서 언급된 사실을 알아햐 한다. 노이의 남편 집안인 “아쌴티아” 집안 중 남편의 아버지, 즉 노인의 시아버지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본인이 운영하던 공장에 불을 질러 공장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보험금을 타기 위한 조작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시아버지는 자살한다. 화재의 마지막 희생자는 아쌴티아 집안에 저주를 걸었다. 이 저주는 아쌴티야 집안의 남자에 대한 저주로 밍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 암에 걸려 사망했고, 밍의 오빠는 밍과의 근친 관계로 인해 자살했다.
이 저주는 남자들에게만 살을 날렸다. 대부분의 사회가 부계사회이듯, 대를 끊기 위해 혹은 집안에 대한 저주로 남자들에게 살을 날렸다. 하지만 이 눈먼 노인은 이 살을 피해간 여자인 밍에게 살을 날렸다. 즉 눈먼 노인 또한 영매로서 공장에서 불탄 피해자 유족일 확률이 높다. 아니 유족일 것이다. 남자들은 저주가 진행되었지만, 여자들은 저주를 피해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밍에게 시체를 발견한 순간 저주가 옮겨갔을 것이고 영매인 노인이 밍에게 살을 날림으로써 본격적인 저주와 지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살을 날린 것이 “님”이 아닐까에 대한 의심을 했었다. 님은 이미 절대자(바얀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언니의 기망행위로 대신 랑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당위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곡성> 세계관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님이 살을 날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님은 조카인 밍에게 진심이었고, 살을 날린 대상을 생각하면 눈먼 영매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밍의 친구가 보여주었던 휴대폰 영상 속에서 밍은 질투 많은 아이의 행동을 한다. 아이들 놀이방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같이 있던 아이를 밀치고 화를 내며 욕을 한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이 영상의 촬영 시기가 장례석 이전이냐 이후냐를 알아야 하는데, 영화의 플롯상 이후가 될 것이다. 아버지의 시체를 가장 먼저 접촉한 순간, 그녀는 아버지의 저주를 이어받았을 것이고 영매가 살을 날림으로써 본격적인 악귀의 지접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인 님의 인터뷰 직전, 마지막 컷이 ‘아쌴티아’라고 적혀있는 저죠 인형을 보여준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3. 색깔
<랑종>은 나홍진의 이전 영화인 <곡성>과 같이 끊임없이 답을 던져준다. 그리고 의심하게 한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색깔”이다. 영화 초중반까진 자연 자체의 색을 보여주면서, 시각적으로 강렬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회색 바얀신의 석상, 나무로 지어진 집, 무채색을 입는 주인공의 옷들까지 색의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영화 중반 밍에게 악령이 씌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님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밍의 몸에서 “검은색”이 나오는 것을 우리는 목도한다. 검지를 물컵에 담근 후 주문을 외웠더니 검은색 물이 빠져나왔고, 입을 통해 검은 무언가를 쏟아낸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검은색”을 악령의 색으로 규정한다. 이외에도 님이 맥이 자살한 나무 앞에서 기도를 지낼 때, 수많은 달걀을 까면서 등장한 “검은 액체”로 악령의 존재를 눈치챘고, 퇴마를 진행할 때도 싼티가 “검은 소”의 머리를 통해 “검은색”을 규정한다. 밍의 안색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 또한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악령”이 “검은색”으로 규정된다면, “바얀신”이라고 불리는 절대자 혹은 선은 어떤 색으로 규정되는다. “바얀신”은 특정 색깔로 규정되지 않는다. 애초에 프레임에 등장하지도, 담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비되는 것은 “인간”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색은 빨간색으로 규정할 수 있다.
“빨간색”은 인간의 피 색깔이다. 밍의 알 수 없는 “하혈”과 칼을 들고 공격하는 밍을 막으려다 흐르는 “마넷”의 피 그리고 마지막 퇴마 시퀀스에서 두건을 쓰고 “피를 토하는 노이”를 볼 수 있다. 거기에 마지막 시퀀스에서 모든 퇴마사와 촬영팀이 피를 흘리게 된다. 사람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 혹은 “부상”이다. 피를 흘리는 모든 장면에서 인물은 다치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피를 흘리지만 직접적으로 죽음을 빗겨나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밍”이다.
“밍”의 알 수 없는 하혈은 “밍의 죽음”으로 치환된다. “밍의 죽음”이라니 무슨 일인가. 바로 “자아 죽음”이다. 정확히 “밍의 알 수 없는 하혈”을 기점으로 밍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밥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한다. 밍에게 온갖 악령이 달라붙어 상황이 점점 심각해진다. 물론 님의 침묵으로 인한 노이의 고집으로 사이비 신내림을 통해 지접이 가속도가 붙은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밍의 하혈 시작 후, 밍이 본격적으로 정신을 잃어간다. 밍이라는 육체에 본체인 영혼 혹은 밍이라는 ‘자아’는 이 기점으로 사망하고 악령이 지접 하여 밍을 이끌어나간다는 것이다.
마지막 퇴마 시퀀스에서 “피를 토하는 노이”는 같지만 층위가 다른 선상에 있다. 집에 있는 밍을 대신해 노이는 희생자가 된다. 악령에게는 이러한 행동은 “기망”이다. 만약 정말로 퇴마에 성공해 단지에 악령을 담았다면, 노이는 “붉은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닌 “검은 피”를 토했어야만 했다. 즉 악령은 기망행위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이 피를 토하는 행위를 기점으로 노이는 죽음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노이가 토하는 피는 악령이 퇴마사에게 선사한 기망 행위다.
또 한 곳에서 우리는 빨간색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퇴마를 하기 직전 컷인데, 노이가 퇴마사인 싼티의 차와 발언에서 알 수 있다. “퇴마가 성공할까요?”라는 질문에 “차 뒤에 어떤 스티거가 붙어있는지 아십니까,”라고 답하며 카메라를 이동하는 차의 뒷모습을 클로즈업한다. 청색 차에 “이 차는 간색입니다”라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태국에선 “빨간색”이 무당의 색이라고 한다. 결국 이 행위 또한 악령을 “기망”하는 행위인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바로 직전의 대사였던 노이의 “나 때문에 딸과 님이 죽었어. 나는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는 대사와 “기망행위”를 조합하면, 두건을 쓰고 퇴마 하는 인물은 “밍”이 아닌 “노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망 행위를 통해 사실 “퇴마의식”의 실패는 예정된 사실이었다.
결국 이러한 색깔 대립으로 우리는 인간과 악을 규정했다. 하지만 색깔로서만 우리는 선을 예측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절대자 혹은 선이라고 불리는 바얀 신을 목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악령은 끊임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며, 우리는 현혹한다. <곡성>에서의 마지막 장면인 일본인이 검은색 악마로 변하는 장면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같은 의미로 작동할 것이다.
4. 방관
내가 즐겨보는 침착맨의 유튜브 영상 중에서 게임 <어몽어스>를 했던 적이 있다. 어몽어스는 임포스터라고 불리는 외계인을 찾기 위해, 일반인이 추리하는 게임이다. 쉽게 말하자면 마피아 게임과 같다. 이 영상에선 임포스터였던 침착맨과 풍월량이 일반인을 아무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발각되어 투표로 죽으면서 게임이 끝난다. 그리고 외친다. “내가(임포스터가) 아무도 안 죽였으니 임포스터는 너네들인거 아니야?!”
뇌절을 해봤다. 미안하다. 사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나홍진의 세계관”에 대한 것이다. 나홍진은 <추격자>, <황해>, <곡성>에 이어 이번 영화 <랑종>까지 하나의 궤를 뚫는다. 바로 “절대자(선)는 우리를 방관하며, 악은 현실 혹은 가까이서 우리를 끊임없이 현혹한다. 그리고 희망 따윈 없다”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서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안다. 기독교에는 “믿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의 문구가 있다. 여타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가장 기본적 출발은 “믿음”에 기인한다. 이는 민속신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신이자 절대자인 “바얀신”에 대한 믿음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신을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고 있는지도 후반 가선 흐려진다. 님은 언니인 노이를 대신해 랑종(무당)이 된다. 신과 인간의 중간 역할을 하는 그녀지만 영화 중간중간 그녀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겨난다. 밍이 아픈 이유를 처음엔 “바얀신의 신내림”으로 추측하지만, 이내 “맥”의 빙의로 전환되고, 그가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걸려 알아낸다. 사실 님이 “밍의 할아버지에 관한 악령”이라는 것도 영적인 능력보단 “추측”으로 알아낸 것이라 본다. 마을은 폐쇄적이고 토속적이다. 토속적이라는 것은 인구의 구성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쌴티아 집안의 저주와 원죄를 이미 알았던 님이기에 “추측”을 통해 알아냈을 것이다.
그 의심은 마지막에 이르러 확신으로 드러난다. 퇴마 전날 님은 갑자기 사망한다. 사망하기 직전 님과의 인터뷰에서 님은 “한 번도 바얀신이 내 몸에 있는지 확신한 적이 없다”라고 한다. 분명 영화 초반에 신내림으로 인한 고통에서 그를 받아들인 후, “신내림”에 대한 고통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그녀는 늘 바얀신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나홍진의 세계관에서는 “절대자는 늘 방관한다”는 큰 틀을 유지한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곡성>에선 무명이라는 인물에 대한 종구의 의심이 일을 그르쳤고, <황해>에서는 구남이 구원받지 못했고, <추격자>에선 미진의 희망을 누구도 구원해주지 못한 채 어항 속 머리로 남았다. <랑종>에서는 희망인 바얀신(절대자)이 등장조차 하지 않고 일이 망가진다.
필자가 생각하는 유일한 바얀신의 등장은 앞에서 언급한 “님의 죽음”이다. “님의 죽음”에 관해서는 두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님을 죽음으로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서 미리 해방시켜준 것이다. 둘째는 불신한 님을 죽음으로서 바얀신의 원죄를 속죄시킨다는 것이다. 님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첫 번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님의 죽음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첫 번째 이유였다면, 마지막 에필로그는 들어가지 말았어야 한다.
영화가 <곡성>에서 일광의 전사를 다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광은 둘 중 하나로 압축된다. 님이냐, 밍이냐. 랑종이 되어버린 님이냐, 악령에 지접된 밍이냐. 님이 일광이 될 경우, 바얀신을 믿으며 절대자와 선이 있다고 믿었던 님의 타락으로 일광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이는 바얀신을 의심한 연장선 위에 놓일 것이다. 반대로 밍의 경우, 절대자의 신내림을 거부했던 자의 딸이 악령의 지접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 이야기 모두 가능하지만, 절대자의 방관이라는 나홍진의 세계관에선 타락한 님의 이야기가 조금 더 일광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밍의 꿈을 기억해보자. 밍의 꿈은 “부적을 온몸에 붙인 남자의 머리가 바닥에 있고, 그 머리가 무언가 말을 하는데 들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복선임을 예상했다. 이후 등장하는 바얀신의 석상에서 머리만 잘려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님이 껴앉고 우는 것을 말이다. 이 복선이 시각화되고 프레임에 담김으로써 퇴마의 실패와 절대자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는 추측할 수 있었다.
절대자의 방관은 앞에서 말한 “기망 행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이는 어렸을 적, 신내림을 거부하고 님에게 랑종을 전가하기 위해 신을 기망한다. 속옷을 님에게 입히고, 부적을 님의 신발에 넣는다. 결국 님은 랑종이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노이는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다. 기독교를 믿던 노이는 이후 알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자 다시 민속신앙을 믿기 시작한다. 기독교에선 “예수가 아닌 다른 신을 믿는 것은 원죄”에 속한다. 결국 이 행위를 통해, 노이는 바얀신과 예수 모두로부터 버림받는다.
이러한 기망 행위를 다시 한번 노이가 저지르는 것이다. 밍인 척 악령을 퇴마 하기 위해, 두건을 쓰고 밍인 척 등장했지만 악령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벌어진 기망행위가 모든 것을 그르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목도했다. <곡성>에서 목도했고, “님의 죽음”을 통해 목도했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퇴마는 실패할 것이라 단언할 수 있었고, 현혹되지 말았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바얀신은 등장하지 않고 믿음에 대한 저주를 내린다. 님은 죽음으로서, 노이는 가족에 대한 저주로서 모든 것을 속죄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갑자기 노이가 일어나 “바얀신을 처음으로 느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바얀신이 아닐 것이다. 희생자들의 악령과 지접 한 밍과의 대립이 있는 것을 보아 노이의 “시아버지”가 지접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바얀신은 “조상신”이며, 시아버지 또한 노이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이하게도 바얀신이라고 착각한 노이의 마지막에선 밍과 “악령과 악령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비얀신은 방관 한다. 끝까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며,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생가기 없다. 마지막 시퀀스가 두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보자. 밍의 집과 퇴마가 이뤄지는 폐공장으로 촬영팀은 나눠진다. 폐공장을 퇴마로서 원혼을 달래는 공간이지만, 밍의 집에 남은 것은 밍을 가둔 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사실 밍을 가두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초보 퇴마사는 그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미뤄보았을 때, 이 퇴마는 무조건 실패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곡성>에서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무명의 조언을 듣지 않은 종구가 현혹되어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듯, 팡이 아들 퐁의 울음소리에 현혹되어 모든 것을 망친 것처럼 보였다. 사실 팡이 모든 것을 망치지 않았다. 애초에 님의 죽음과 붉은 피를 토하는 노이를 통해 퇴마는 실패할 것이라 던져줬고, 팡이 현혹되는 장면으로서 관객은 팡으로 인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라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화가 관객을 현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곡성>에서 그렇듯, <랑종>에서도 관객에게 답을 주었지만 관객을 현혹하고 기망하여 끝낸다. 절대자는 방관하며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은 채, 아니 애초에 희망이란 영화에 존재하지 않은 채 영화는 끝을 낸다.
5. 카메라와 <랑종>
분명 <랑종>은 나홍진의 세계관을 답습하고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이미지적 불편함을 떠나,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페이크 다큐”를 자처한다.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끊임없이 흔들리며, 촬영팀의 의도대로 카메라가 움직인다. 그런데 영화의 카메라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몰입을 방해한다.
극영화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전지적 위치에 놓인다. 영화 속 세계에서 인물들은 사건을 진행시키지만, 카메라의 존재를 모른다. 카메라를 직접 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며, 응시하더라도 인물의 시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극영화의 세계 속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페이크 다큐”는 1인칭 혹은 3인칭의 시점으로 세계에 접근한다. 즉 영화 속 세계에 카메라가 직접 인무로 참여한다. 그러면서 인물과 소통하며 세계가 진행되고 사건이 발생한다. 카메라가 모든 것을 잡지 못하고, 인물을 따라가면서 시점이 진행된다. 즉, “페이크 다큐”의 세계에선 카메라는 인식되고 존재한다.
하지만 <랑종>에서의 카메라는 “페이크 다큐”의 카메라 위치와 “극영화”의 카메라 위치를 반복한다. 밍을 따라가는 인터뷰에선 “페이크 다큐”의 위치를 고수하지만, 밍이 클럽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장면에선 극영화의 위치를 고수한다. 이 영화가 어떠한 위치를 고수하려고 하는지 헷갈릴 정도로 이러한 카메라 위치 반복 운동은 영화 중반까지 지속된다.
왓챠에는 <랑종>에 대한 이런 평이 있다. “귀신에게 책임을 전가한 스너프 필름, <랑종>에서 카메라는 최악의 공범이다.(CineVet님 평)”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방관자이자 공범이다. 즉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바얀신과 같은 위치를 선점하며 또한 악령의 살인에 동조한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위치는 시종일관 위치를 고수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이 사태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된다. 대표적으로 화장실에서 밍이 하혈을 닦는 모습을 카메라는 관음증적 시선에서 위치하여 바라본다.
이후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오마주인 양, CCTV를 설치하여 카메라의 위치를 다시 한번 바꾼다. 카메라는 거실뿐만 아니라, 마닛 부부의 침실까지 점령한다. 정말 밍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면, 밍의 방과 거실에만 CCTV를 설치하는 것이 옳지 않았는가. 직장에서 밍을 해고하는 사장도 밍이 회사에 남자를 불러와 관계를 가지는 장면을 촬영팀은 여과 없이 노출하지 않았는가. 결국 “페이크 다큐”를 자처한 <랑종>의 카메라는 영화를 흩뜨리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나홍진 감독이 결말을 “무자비한 도륙 후, 밍이 정신을 차리고 아무도 없는 숲을 걸어 나간다는 컷을 생각했다”라고 한다. 만약 그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났다면 영화는 최악이 되었을 것이다. <곡성>에서도 마지막 종구의 회상 장면이 아쉬웠듯, 이 영화의 마지막은 여기가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카메라가 그 장면을 잡고 영화에 붙였다면, <랑종>은 쌓아 올린 페이크 다큐의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생각했지만 여기서 줄여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최대한 낮추고 “공포영화”가 아닌 “오컬트 영화”라는 것에 집중한다면 영화는 충분히 괜찮을 것이다. <곡성>에 현혹된 당신, <랑종>에게도 현혹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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