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메라와 역사의 정치성은 결부된다 >
욱일승천기와 함께 시작되는 일본의 해군가는 2000년 영화가 맞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흑백과 필름으로 담아낸 아날로그. 2.35:1의 현대 시네마스코프를 담지만, 내용은 1.33:1 혹은 1.85:1. 즉, 과거로 회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비율과 내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① 흑백과 카메라 운동 그리고 시네마스코프
현대 영화와 과거 영화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은 화면 비율이다. 1.33:1에서 1.85:1로. 다시 1.85:1에서 2.35:1의 시네마스코프로 넘어온다. 이 차이점은 영화의 비율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도 큰 차이를 가져다 준다.
35mm 필름 탄생과 함께 시작된 영화의 태동기는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이윽고 1.85:1을 통해 관객은 더 넓은 화면에서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영화인가? 그렇다면 영화 속 장소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선 주된 장소인 시골과 조금 더 큰 장소인 도시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줄곧 사실을 숨긴다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의 흐름에 따른 감정이다. 물론 1945년을 기점으로 한 전후 역사는 이 영화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 역사를 전면에 내세워 관객으로 하여금 주제를 숨긴다. 역사와 시대의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인물에 집중한다. 가장 첫 번째. 이 영화는 2000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흑백’ 영화다.
흑백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색을 이분화 시키고, 관객의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영화는 흑백을 사용한다. 배경을 보자. 바닷가와 이를 끼고 있는 산골. 그리고 엄청난 자연 풍경. 이 영화가 흑백이 아닌 컬러였다면, 인물과 사건보단 배경을 비롯한 시각적 효과에 매몰되었을 것이다. 덧붙여 하나야와 동한천을 신경쓰는 마다산 부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옷의 색깔과 피부 색깔 그리고 주변 색깔이 비슷한 환경에서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관객은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즉 관객이 사건과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세운 가장 첫 번째 요소다.
두 번째. 카메라 운동과 앵글. 영화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인다.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이나 감정에 따라 운동한다. 이 부분은 앵글과 접목된다. 회의 장면에서 마다산이 일어나 본인의 주장을 피력하며 움직일 때, 카메라는 마다산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머지 인원은 앉아서 마다산을 바라본다. 즉 카메라를 등진다. 이 때 카메라의 앵글은 마다산에겐 바스트 샷을 나머지에겐 앙각을 부여한다. 카메라의 위치를 전환시키며 권력을 인물에게 부여하고 집중시킨다. 인물의 감정과 동시에 카메라는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를 차례로 순환시키며 힘을 부여한다.
반대로 이 영화에선 부감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등장은 한다. 첫 쇼트에서 일본군이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을 부감으로 잡는다. 하지만 이 쇼트마저 처음부터 부감으로 잡는 것이 아닌 앙각으로 시작해 카메라 시점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부감으로 이동한다. 반대로 이 영화에선 수많은 앙각 쇼트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왜 부감이 아닌 앙각을 잡는 것인가?
이 카메라의 쇼트는 클로즈업, 바스트 샷, 앙각, 풀샷(수영 장면 혹은 마을이 불타는 쇼트) 정도로 이루어져있다. 이 영화가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역사 영화였다면, 영화의 시점은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이 맞을 것이다. 영화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인물을 아래로 보는 시점인 부감을 사용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화는 부감으로 인물과 배경을 잡지 않는다. 오히려 앙각으로 인물의 표정과 대사에 집중한다. 즉, 이 영화는 역사를 전면에 배치하지만 말하는 이야기의 배경일 뿐 주제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부감의 부재는 인물의 존재로 치환된다.
그렇다면 왜 시네마스코프를 사용하는가? 인물과 감정에 집중했다면 1.33:1 혹은 1.85:1을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영화의 요소와 내용까지 보아도 이전 영화의 비율을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5:1의 현대 영화 비율을 가져온 것은 흑백과 카메라 운동의 결과다. 먼저 인물의 감정은 색깔보단 흑백이 정적인 카메라보다 동적인 카메라가 잘 표현된다. 특히 이 작품의 주된 감정은 긴장감이다. 관객은 흑백 스크린에 클로즈업 된 인물을 본다. 거기에 더 넓은 스크린으로 좌우 공백이 넓어졌다. 단순히 정보량을 늘리기 위해 2.35:1을 사용한 것이 아닌 감정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더 넓어진 공백 탓에 관객은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이는 긴장감을 조이는 효과로 이어진다. 결국 이 영화 모든 설정은 인물과 감정을 위한 것이다. 매우 정치적인 영화며 끊임없이 운동한다.
②역사의 정치성
이전까지 주장은 영화 요소로써의 정치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 우리는 이 영화가 시나리오 측면에서 정치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영화적 요소를 끌어와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부감은 부재한 채, 앙각만이 존재한다.(일반적인 앵글을 제외하면) 이것이 시나리오 측면의 정치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앙각과 부감은 카메라를 위치함으로써 인물에게 힘을 부여한다. 앙각은 인물에게 힘을 부여하지만 부감은 인물에게 힘을 빼앗는다. 카메라보다 낮은 위치에 인물을 놓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위치 에너지를 통한 계급을 인식하게 한다.
영화는 이 앙각을 이용해 역사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첫 앙각은 일본군에게 부여한다. 마을사람들이 보는 일본군에 대한 시선을 카메라로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봐도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기 전까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중국을 지배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보아 당시 중국인은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존재로 비춰진다. 중국인의 시선에서 일본인은 그들보다 계급적으로 높이 위치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포로들을 처형하기 위해 도시에서 사형집행인을 데려온다. 그는 중국 내에서 처리가 깔끔하기로 유명하다. 그를 모시기 위해, 마다산은 재산인 콩까지 친척에게 바치면서 섭외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다. 실패한 후 한마디, “이걸로 나의 명성은 끝이 났어!”
이 한 마디는 중국 역사를 가로지른다. 은나라부터 시작한 중국 역사는 수많은 민족 침략을 당하면서 이어졌다. 일본은 언제나 역사에선 중국에게 밀렸고, 위치상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그들의 위치는 역전된다. 진시황의 역사와 제갈량의 역사, 청나라의 역사는 이 기점으로 무너진다. 사형집행인의 한 마디는 중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정치성은 계속 유지한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정치성은 하나야가 복귀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쇼트에서 하나야와 마을 사람들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까스까 중좌와 나머지 일본군은 위에 위치한다. 그 중에서도 하나야와 마을 사람들의 뒷모습과 중좌의 앞모습을 비춰주는 쇼트는 일본이 중국의 위치에서 절대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중국의 일제강점기를 앙감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앙감도 결국엔 역전된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으로 일본은 패망한다. 중좌는 전쟁에서 졌지만 마지막 정신승리를 하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하나야를 살려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지른다. 영화는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다. 하지만 패망의 일본군 자리를 미군과 대만군이 채운다. 즉 연합국이 다시 중국을 지배한다. 일본군의 자리는 아래로 향하고 미군과 대만군이 위로 올라선다. 중국과 일본의 위치는 같아진다. 그러나 중국은 피지배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과 일본의 위치가 같아지는 결정적 쇼트는 마다산이 항복한 일본군을 습격하면서 이루어진다. 앞선 쇼트에선 마다산은 중좌를 올려다본다. 이는 앙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마다산이 습격하면서 위치는 같아진다. 올려보았던 위치로 마다산이 올라갔고 중좌를 비롯한 일본군을 공격한다.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위치는 떨어지며 중국과 같아진다. 역사는 패망한 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전된 위치에서 앙감을 통한 정치성은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일본의 패망부터 다마산이 처형당하는 그 순간까지 미군과 대만군은 일본과 중국 위에 자리한다. 연합국의 승리라는 이유로 전 세계의 평화라는 구실과 함께 또 다시 누군가의 위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지배자이며 통치자로 올라선다. 결국 이 영화는 영화적 요소와 시나리오 모두 정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겐 끝나지 않은 질문이 남아있다, ‘나’라고 말한 마다산에게 두 명의 포로를 넘겨준 인물은 누구인가? 왜 마다산의 처형과 동시에 색깔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가? 이것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결국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정치성을 던진다. 포로를 납치해 마다산에게 넘겨준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컬러의 사용은 근대화를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알지 않는 것이 이 영화를 위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