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PARASITE, 2019)

<기생충은 숙주를 타고 올라가 죽인다.>

by 늘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은 1년마다 꼭 회충약을 먹으라고 하신다. 주기적으로 몸에 있는 회충을 없앰으로써, 내가 먹은 음식의 영양분을 흡수한다. 하지만 몸에 기생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숙주는 서서히 기생충에게 영양분이 빨리면서, 이윽고 기생충에게 죽게 된다. 기생충은 숙주를 죽인다.
이 작품은 수많은 키워드가 있지만, 중요한 키워드는 수직과 수평 그리고 냄새다.
프레임은 지상의 맨 끝, 바닥을 담는다. 위에서 아래를 비추는 것이 아닌, 바닥보다 아래의 공간에서 바닥과 위를 비춘다. 또 다른 프레임인 창문을 통해 반지하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기택의 가족을 비춘다. 지하에서 바라보는 지상의 끝.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지상에 살지 못하는 지하의 인간이며, 이와 동시에 영화는 관계를 수직적으로 정의한다. 화장실 변기 옆에서 현대 과학 기술의 상징인 와이파이를 잡는 순간조차 그들은 수평에서 수직으로 움직인다. 가장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변기라는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세상과의 연결. 그들의 집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의 도달과 동시에 그들은 계급으로 정의된다.

기생충은 숙주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기택의 가족은 우연한 기회로 동익(이선균)에게 오른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간다. 상하 수직 운동을 반복하며, 기택의 가족은 동익에게 기생한다. 그러면서 가족은 이러한 일을 ‘상징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상징적’이라는 단어의 뜻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본래 기생충에게 기생하는 일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상징적‘은 ‘특별한’, ‘기록에 남을만한‘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말로 ‘일상적이지 않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상징적인(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로 치환된다. 즉, ‘상징적‘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기생충이라는 개념이 기택 가족에게 입혀지는 순간이다.
기택 가족의 숙주인 동익은 ‘선’을 강조한다. 동익의 선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작용한다. 차의 앞좌석과 뒷좌석, 유리창의 선을 통해 수평으로 계급을 나눈다. 기택 가족과는 다르게 여태껏 수직으로 작용했던 계급이, 수평으로 작용한다. 즉, 동익은 수평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용인하지만, 본인만의 영역인 선은 넘게 되면 바로 내치는 일종의 데드라인이다.*
기생충인 기택 가족은 숙주인 동익의 수평운동을 침범하지 않으며, 숙주의 머리를 향한 수직 운동을 한다. 숙주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슬아슬하지만 결국은 선을 넘지 않는다. 즉 숙주가 규정한 선 안에서 기생충들은 수평운동을 한다. 기생충과 숙주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직과 수평이 직각을 만들어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주의 수직운동은 집에서만 반복하며, 의미가 아닌 운동으로서 단순한 수직성을 보인다. 그저 몸 안에서의 이동을 말한다. 하지만, 기생충에겐 이러한 운동마저 수직 운동으로 작용한다. 기생충은 숙주의 개체를 만나는 직접적이고 은밀한 장소가 집안의 2층이다. 기우(최우식)가 다혜(정지소)를 만날 때 그랬고, 기택이 연교(조여정)를 만날 때 그리고 기정(박소담)이 다송(정현준)을 교육할 때 2층을 이용한다. 그들에겐 공동의 생활공간인 몸(육체)보다 더 높은 곳, 즉 정신을 담당하는 머리(정신)까지 지배하려는 기생충의 모습이다.

영화는 지겨울 정도로, 수직과 수평을 무한 반복한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의 객체는 숙주가 아닌 숙주를 바라보는 기생충이다. 머리까지 점령한 기생충은 숙주의 선을 침범한다. 물리적으로, 행동으로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냄새‘로 그들의 영역과 선을 침범한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눈이 가려졌다. 우리는 눈으로 사실을 직시하기 어렵다. 숙주가 기생충의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듯이, 눈으로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숙주가 기생충을 직시하는 법은 후각인 것이다. 아무리 지워도 빠지지 않는 반지하의 냄새. 그 냄새는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계급보다 강하다. 그들이 아무리 숙주의 몸에서 기생하며, 숙주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해도 남아있는 그것. 바로 냄새다. 수평과 수직이 안정적으로 직각을 이루고 있었지만, 반대로 냄새로 선을 넘은 숙주가 직각의 안정성을 무너뜨리고, 결국 기생충에게 죽는다. 기생충과 숙주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다.
숙주를 죽인 기생충은 결국 또 다른 기생충에 의해 박멸된다. 더 오랜 시간 숙주의 몸속에 기생하던 또 다른 기생충은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숙주의 몸 가장 아래에서, 숙주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숙주와 물아일체가 되었다. 이내 새로운 기생충을 죽이고, 본인도 장렬하게 전사한다. 살아남는 법을 알았지만, 주인을 위해 죽는 것. 숙주 몸에서 기생하던 기생충은 숙주를 위해 아이러니하게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기생충 한 마리가 또다시 새로운 숙주의 몸속에서 기생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과연 기생충에게 행복을 나누어 준 숙주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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