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Burning, 2018)

< 원죄의 소각은 속죄를 의미하는가? >

by 늘픔

오늘도 한 청년이 물류를 나르고 있다. 더운 여름날 어깨에 옷을 한 아름 지고 가게로 들어선다. 그 가게 앞 행사 도우미 여성이 청년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성적 관심처럼 보였던 한 장면은 이내 그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대화로 넘어간다. 그들은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으며, 오랜만에 만난 관계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그들의 관계는 이내 회복 단계를 넘어, 발전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청년 종수(役 유아인)는 해미(役 전종서)에게 빠진다.
이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이전 작품인 『시(Poetry, 2010)』와 결을 같이 한다. 주인공 모두 극단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휘말려버린 상황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까지. 세세한 부분으로 파고들자면, 주인공 모두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 사람들이며 본인 혹은 본인 주변에 자유를 찾는 인물과 성적 쾌락을 얻고자 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민낯을 샅샅이 보여준다.
해미가 종수를 집에 불러놓고 이야기를 한다. 본인이 성형한 이유는 네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못생겼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는 ‘진실을 말해봐’라고 말한다. 과연 이것은 과거에 대한 사과를 바라는 장면인가? 아니면 또 다른 죄책감을 안겨주기 위한 장면인가? 이로서 원죄는 성립된다. 이후 등장하는 둘의 섹스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해의 의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죄책감의 연장선인가? 우리는 섹스 장면 중 한 가지 장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수가 콘돔을 끼우려는 장면에서 혼자 해내지 못하고, 해미가 끼워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종수보단 의지하고 기대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종수를 의미한다.
종수는 파주로 돌아온다. 파주 집에는 생기가 없다. 축사에 있는 유일한 송아지 한 마리조차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과거의 흔적만이 곳곳에 남아 있을 뿐, 현재의 모습은 과거에 머물러있다. 파주는 종수의 선택이 아니다. 운명이다. 본인이 선택해서 대남방송이 울리는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청년실업과 미국에 관한 뉴스를 종수와 같이 배열하는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 아닌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을 의미한다. 결국 종수는 이번 생을 선택할 수 없다. 이는 원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가져온다. 종수는 속죄의 대상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양이의 밥을 주기 위해 해미의 집에 온 종수는 창밖을 보며 자위를 한다. 해미의 사진을 힐끗 보긴 하지만, 창밖을 보며 욕구를 해소한다. 아무도 없는 남의 집에서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듯 보인다. 이후에도 같은 장면이 한 차례 더 등장하며, 이내 그녀의 침대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며 해소한다. 과연 이것은 욕구의 해소인가? 공허한 욕망의 해소는 아닐까? 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가? 이는 내재되어 있는 문제의 표출이 아닌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 속에 그들을 포함시킬 수 있을까.
해미의 집에서 욕구를 해소하던 중, 해미에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전화기 넘어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고 흔들린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순간부터 의심이 든다. 과연 그녀는 정상적인가? 그리고 벤(役 스티븐 연)이 등장한다. 벤은 종수에게 슬픈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기에, 슬픈 감정이 들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눈물로써 증명되는가? 이는 또 하나의 복선으로 작용한다.
벤은 종수를 그의 집으로 초대한다. 요리를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벤은 인간이 신에게 재물을 바치듯이, 본인에게 재물을 바치는 것이라 설명하며 메타포를 언급한다. 이 작품은 메타포의 작품이다. 시종일관 남산타워, 송아지, 파주와 대남방송, 비닐하우스 등의 상징적인 것들과 함께 메타포적 상향 곡선을 그려간다. 결국 이 대사는 이 작품의 정의이다. 이 작품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대사.
이후 등장하는 비닐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벤이 정의하는 비닐하우스 태우기는 그저 스트레스 해소용이며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는 일종의 비와 같다고 말한다. 비는 홍수를 일으키며 사람들을 떠내려가게 하지만, 옳고 그름 따위는 없으며 동시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언제나 있으며, 어디에도 있는 그런 존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쓸모없고 필요 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움으로써,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회귀시킨다. 그럼 여기서의 버닝(소각)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비닐하우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으로 한정시키고 쓸모없고 필요 없다는 수식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 같은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정의에 대해선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메타포와 비닐하우스는 같은 선상에 있으며, 결을 같이한다. 즉 비닐하우스 또한 메타포인 것이다.

정확히 이 만남 이후로, 해미는 실종된다. 그녀의 집 비밀번호도 바뀌었고, 고양이도 없어졌으며 집안 또한 이전과 달리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변 정리가 말끔하게 되었다. 종수는 벤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부터 벤이 종수의 삶에 개입하던 상황은 역전된다. 종수는 벤의 삶을 엿보며 끈질기게 개입하고자 한다. 사랑인지, 의지의 대상인지, 욕구 해소의 대상인지 모르는 그녀를 위해.
종수는 매일 새벽 비닐하우스를 확인한다. 짙은 안갯속을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앞날을 향해 달리는 그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전의 장면에서 종수로 추정되는 어린아이가 소각되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보고 있는 장면을 통해, 비닐하우스의 소각과 종수 또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장면의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아 매일 새벽, 비닐하우스를 점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 그녀를 찾기 위해 여명의 안갯속을 헤치고, 하루 종일 벤을 미행한다. 하지만 벤은 이미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말했으며, 해미 또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말한다. 비닐하우스는 태워졌고 연기처럼 그녀는 사라졌다. 확신은 아니지만, 의심은 증폭된다.
실마리를 찾고자 해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로 간다. 그곳에서 작품 초반에 나온 우물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우물은 그녀의 집에 없었고 그러한 일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이 지점부터 과연 해미와의 일들이 실재했는가에 대한 의심이 든다. 당사자들은 알고 있지만, 정작 가족들은 모르는 일. 심지어 동네 이장조차 우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그들의 과거는 존재했으며, 원죄 또한 존재하는가?
16년 만에 만나는 종수의 어머니는 가관이다.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아버지 때문에 자식들을 두고 도망쳤다는 얘기는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자. 그녀 또한 종수와 종수 누나에겐 가해자다. 필연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으로써 발생한 상처는 누가 치료해주는가. 그렇게 상처를 받은 아들에게 16년 만에 만나 하는 첫 이야기는 500만 원만 빌려달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피해자는 아들 종수다. 그는 운명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글쓰기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 탄원서를 쓰며 소비한다.
미행을 우습다는 듯이 따돌리고 벤은 종수와 마주친다. 그리고 집에 초대한다. 지난번에 존재하지 않던 고양이가 있었고, 카메라 앵글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불안한 카메라 앵글은 종수의 마음을 대변해주듯 투박하다. 첫 방문 때 보았던 화장실 선반에서 종수가 해미에게 선물한 시계가 나왔다. 그리고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고양이의 모습이 드러난다. 해미의 집에서도 보이지 않던 ‘자폐증’ 고양이 보일이는 벤의 집에 있었다. 이로써 종수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한다. 이를 기점으로 종수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해미는 벤에 의해 실종된 것이라고.

파티에서 해미를 대신하는 여자는 해미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대화를 주도하고, 대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이끄는 상황이다. 벤은 똑같이 하품을 하고 종수와 눈이 마주친다.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종수는 집에서 떠난다. 벤은 떠나는 그에게 안에서 오는 진정한 떨림을 느낄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한다. 이들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듯하다.
종수의 아버지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징역을 받게 되었고, 송아지마저 팔아버린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현재를 바꾸려는 피해자 종수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미네 집에서 잠을 자고 깨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닐까. 과거의 한마디로 인해 시작된 이 모든 것들은 사실 꿈이 아니었을까. 그리고는 잘 쓰지 못했던 소설을 그녀의 집에서 쓰기 시작한다. 그 소설은 아버지에 관한 것인가, 본인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한낱 백일몽이길 바라는 현실에 관한 것인가.
이윽고 벤의 화장실에 있던 여자 화장품의 용도가 밝혀진다. 그는 그의 여자 친구를 앞에 앉혀놓고 그녀에게 화장을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다른 성도착증? 성 취향? 아마도 그것은 본인의 성적 욕구를 풀만한 것이다. 즉, 이 부분은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욕구 해소를 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다만 욕구 해소의 방법이 또 다른 것일 뿐. 그럼 이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와 결을 같이 하는가? 온전히 결을 같이 하지는 않는다. 하나는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함이고 하나는 성적 욕구가 아닌 전소를 통한 쾌락을 의미한다.
찬 겨울, 눈이 쌓인 파주 어느 시골에서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른다. 그리고는 시체와 함께 벤이 타던 차, 종수가 입던 옷을 같이 전소한다. 모든 것을 태우며, 그것을 배경으로 종수는 트럭을 운전하며 멀어져 가며 엔딩을 맞는다. 결국 종수는 작품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으며, 그가 가진 것은 無의 상태가 되었다. 발가벗은 그의 상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럼 종수는 왜 모든 것을 불태웠는가?
종수는 과거에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상처를 해미에게 입혔다. 피해자인 종수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이다. 가족에게 상처를 받고도 남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가해자가 된 그는 해미와 재회한 순간부터 고통의 굴레가 시작된 것이다. 그 원죄를 일깨워주고 속죄하고자 했지만 사랑에 빠졌고, 벤을 만나면서 속죄가 꼬이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은 무의식적 범죄 행위가 아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자각 행위였다. 소각한다는 것. 원래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한 줌의 재로 된다는 것. 피해자였던 종수는 벤을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움으로써, 속죄하고자 했다. 결국 작품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無의 상태로 회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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