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 11일, 실수 하나가 태어났다.
그 실수는 이전의 실수와 연속된 사건이다. 엄마는 외로운 상황에 약해진 나머지 소싯적 인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착하고 성실해 보인다’는 이유로 볼품없는 남성 하나를 골라 얼떨결에 결혼에 이른다. 그리고 외로움에 못 이겨 저지른 결정은 끝내 자신을 길고 긴 외로움으로 인도하였다.
이내 어리석은 결정임을 깨달았으나 결혼 이듬해 자식을 갖게 된다. 결혼 생활은 3년만에 청산했지만 하나 딸린 혹 때문에 깔끔한 싱글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 있는 자식을 여봐란듯이 키워보겠다고 여자 혼자 힘으로 고군분투했으나 애초에 그 자식은 당신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는 특질을 지녔다.
“기집애한테 맞고다니기나 하는”
“어떻게 된 애가 욕심이 없는”
그런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고 번듯한 직장을 갖게 해보겠다고 애썼으니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거지. 혹은 기름이 나지 않는 땅을 연신 삽질한 거다. 어릴적부터 ‘여자 히틀러’라 불렸고 그걸 자랑삼아 늘어놓던 당신에게서 나온 자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심하고 유순한 사내놈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었다. 때문에 답답한 아들의 성격을 고쳐보겠다고 매질을 하거나(초6때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겠다며 공식적인 매질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화가 나면 욕설과 인신공격은 기본, 싸대기와 발길질도 홧김에 튀어나왔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이혼한 남편을 빌런으로 삼고 내가 그 인간이랑 닮아서 저렇다며 푸닥거리를 해댔다.
고통스러운 양육방식을 견뎌내기 위한 나의 생존방식은 개처럼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자아를 지운 채 엄마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듣고 어떠한 말대꾸도 하지 않는 것. 물론 반항심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으나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나에게는 경제권이 없었으니까(실제로 집에서 내쫓긴 적도 몇 차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스카이에 들어가는 것. 엄마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려면, 또 잘하는 것 하나 없고 잘 놀지도 못하는 볼품없는 내가 남들 앞에 으스대려면, 그나마 괜찮았던 공부머리를 이용해서 대학 타이틀을 따자. 과정은 나름 수월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밤 늦게까지 야자를 했고, 주말과 공휴일은 물론 크리스마스에도 휑한 야자실에 출석도장을 찍었다. 고3이 되고 나니 성적은 소위 최상위권이 되었고, 학교에서도 나름 기대를 받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다. 수능은 고3 내내 받은 성적 중 최악이었고, 한 가닥 희망인 수시 논술도 모두 떨어졌다. 수능이 끝난 후 우리 집에는 더 끔찍한 지옥이 펼쳐졌고, 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 잦아졌다.
누군가에겐 어렵사리 들어온 꿈의 대학이지만 엄마는 나의 대학(서울시립대)을 감추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나를 고려대학교에 다닌다고 하였고, 거짓된 존재로 소개된 나는 실망감에 과잠을 맞추지도 않았다. 새내기의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잘 하는 것 없고 잘 놀지도 못하고 잘 생기지도 않았으면서 대학 타이틀도 별 거 없(다고 생각하)던 나를 발견하고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람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나마 몇 동기가 나를 재밌어하거나 어엿삐녀겨 친하게 지내주었다.
그리고 2016년 8월, 자살 시도를 하였다(당시 21세).
그날도 엄마라는 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로 핀트가 나가서 뭐라뭐라 욕설이 섞인 역정을 내기 시작했고, 나는 이런 생활에 넌더리가 나서 버틸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곧장 옷을 대충 입고 집을 나와 근처 은행에서 내 수중의 돈 얼마를 엄마한테 전부 이체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하나를 충동적으로 잡아 탔다. 수유역에서 탑승한 그 버스는 생명의 다리를 향하는 버스였고, 멍청히 창밖을 보던 나는 1시간 여를 달린 끝에 속칭 ‘마포대교’에 도착했다. 다리 난간의 수많은 글귀를 읽고서도 예상대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한강에 투신하려 했으나 맨정신에 어렵겠다 싶어(소심함이 목숨을 살렸다) 데스페라도 한 캔과 순하리 한 병(나는 당시 생 소주를 못 마시는 알쓰였기 때문)을 빈 속에 비우고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데……흐어어링ㄴ로밍롬ㅇ니롬ㄴ읾닝#%$^#&#$^%#*#&%@%^@afjalds.. 술이 너무 취해서 그대로 노숙을 했고, 다음날 눈을 뜨니 경찰로부터 수십 건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뭐 자고 일어나니 죽고 싶다는 생각은 꽤 희석되었고(예나 지금이나 내 스트레스 해소법은 ‘잠’) 무사히 귀가하여 경찰에도 전화를 통해 생존 신고를 하였다.
자살 시도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지만 내 인생의 분명한 터닝포인트였다.
“내가 죽을 용기도 없어서 삶을 연명하는 거라면, 기왕 사는 삶을 그래도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
이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다.
또한 이후 학교 내의 정신건강상담센터에서 상담을 통해 나의 개인적 이야기를 상담사님께 털어놓으며 정신적으로 엄마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물꼬를 트게 되었다. 거기에 새로 들어간 독서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만나 연애라는 것을 해봤고 그 분의 소개로 페미니즘 책을 접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나를 발견하게 도왔으며,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해준 고마운 사상이다. 엄마 밑에서 자라며 나는 내 소심함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억지로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잘나가기 위해 노력했고(실패했다), 남자답게 굴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했다. 남고에 진학해서 생활할 때는 내가 남고 생활에 퍽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인권감수성이 낮은 문화 속에서 필터링 없이 말과 행동을 할 때 자유롭고 편하다고 느꼈다. 이는 학벌주의 속의 입시 생활과 너무나 좋은 궁합을 이뤄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했고, 후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별도의 시간과 노력을 써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페미니즘을 통해 나는 ‘남자다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또한 타인을 존중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인권감수성을 기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살 시도를 통해 세운 결심이 형태 없이 존재했다면 페미니즘이 명확하게 ‘성형’을 해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또한 나를 나답게 존재하게 도와준 페미니즘에 대한 감사함 때문에 페미니즘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모저모 했던 것 같다. 페이스북에 글을 자주 게시하며 특히 남성인 친구들에게 페미니즘을 전해보려 해봤고, 군대 내에서도 도서관 관리병으로 활동하며 페미니즘 서적을 추천도서로 진열해보기도 했다.
글쎄, 내가 했던 노력은 별 소득이 없었다.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 쟤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거나 웃기는 놈을 봤다는 반응이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던 사람을 우호적으로 바꾸는 데는 일말의 성과도 없었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개인의 변화는 스스로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줄탁동시의 ‘탁(啄)’을 하려 했으나 ‘줄(啐)’없이는 고장난명이었다.
그보다, 나 스스로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인간인가. 지금도 나는 내 안에 남아있는 편견과 혐오적 정서에 놀라곤 한다. 젠더 감수성이 높음을 자부하던 정치권 남성 몇의 연이은 실패를 보면서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둘 수 없었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의 저자 박정훈 기자는 일련의 사건을 마주한 뒤 ‘성폭력 가해자가 되기 좋은 방식으로’ 학습된 남성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회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공감한다. 지금도 내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꼴같잖다고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믿기에 앞으로 나아가본다.
실수에 의해 생겨난 존재인 나는 지금껏 과거에 괴로워하며 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괴로웠던 과거에 의해 미래를 망치게 놔두지 않는다. 나는 경제학을 배웠다. 과거는 ‘매몰비용’이다. 때문에 이미 되돌리거나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앞으로의 의사결정에 고려하는 일은 경제학적 선택이 아니다. 나의 탄생은 설령 실수일지언정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책할 필요도 없다.
진정 자유로운 나는, 앞으로의 일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헤쳐나갈 지혜와 용기가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