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팅(pivoting). 트렌드나 바이러스 등 급속도로 변하는 외부 환경에 따라 기존 사업 아이템을 바탕으로 사업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코로나로 인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글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공기업 취업이 비현실적임을 깨닫고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 진로를 변경하게 된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군대에서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때, 영화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근데 당장 주위에 관련 진로를 희망하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인터넷에서도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헛바람 든 생각 말고 현실적인 진로를 택하자고 결정했다. 행정학과 학생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길은 공무원이지만 나는 대입 수험생 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경험 때문에 또다시 수험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약간 방향을 틀어 공기업을 가기로 정했다.
공기업은 전공 필기 과목이 공무원보다 많지도 않고 막말로 널린 게 공기업이니 원서 넣으면 하나는 붙겠지 싶었다. 그래서 휴학 없이 학교 다니면서 준비하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겠다는 목표로 군대에서부터 전공 필기용 경제학 공부를 착실히 하고 한국사, 토익도 취득했다. 그리고 전역 후 공기업 대학생 기자단을 하면서 나름의 경험을 준비하고 다음해인 2020년, 4학년이 되자 본격적인 원서접수에 돌입했다.
경제학을 군대에서부터 공부해서 기초를 다져놓고 꾸준히 문제풀이를 통해 실력을 쌓은 결과였을까.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응시했던 어느 기업의 필기에 붙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은 서류가 적/부였고 필기와 면접이 각 1회였기 때문에 남은 관문은 면접 뿐이었다. 취업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기대감은 한껏 부풀었고, 면접 스터디를 구해 면접을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면접 당일,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대여한 정장 차림으로 힘겹게 면접을 보러 갔으나 전날 긴장하여 한숨도 못 잔 탓일까, 그야말로 시원하게 망치고 말았다. 면접 최종탈락 1회를 끝으로 상반기 종료.
하반기는 보다 본격적인 취준 시즌이었다. 4학년 2학기 재학중이었지만 지난 학기 23학점 수강이라는 결단으로 졸업학점을 다 채워 사실상 유령회원이었으니 시간에 많은 여유가 생겼다. 정부에서 디지털 뉴딜의 일환으로 마련한 공공데이터 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일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취준이랑 충분히 병행 가능했다. 상반기에 필기를 붙었다는 자신감으로 하반기에 이곳저곳 필기를 응시했는데 결과는 탈락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커트라인에 살짝 미치지 못했으나 이러한 지원자가 어디 한둘이랴.
10월 말에 시즌의 마지막으로 다른 기업의 필기에 응시했다. 시험을 치고 나서 잘 봤다는 생각에 곧장 붙었겠다는 감이 왔다. 그래서 지난 면접 탈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설 면접 컨설팅에 예약까지 걸어두었다. 그리고 약 2주 뒤 필기 결과를 받아들었는데 커트라인에 살짝 밑도는 불합격이었다. 최종면접까지 갔던 상반기와 달리 하반기는 허무하게 면접장에도 가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그러자 나는 묻어두었던 진로를 다시 꺼내게 된다.
공기업 취업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뭔가. 사실 하반기 취준을 하면서 나는 직감했다. 이번 시즌이 공기업 취직의 막차가 아닐까 하고. 공기업 준비생은 점점 쌓여만 가는데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그나마 뽑던 인원이 더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필기의 커트라인은 높아져만 가서 사실 내가 한 곳의 필기에 ‘뽀록’으로 붙은 것처럼 실력에 운까지 따라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필기를 붙어도 이제 면접에서 직무경험이 없으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인턴이 거의 필수가 되었는데 그 인턴을 붙는 것도 너무 어렵다. 이럴 거면 나는 왜 좋아하는 분야에 도전하지 않고 공기업만 바라봤을까.
그래서 곧장 인터넷으로 영화 비즈니스 취업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산업의 직무 중에서 수입, 배급, 마케팅, 극장운영 등이 있는데 마케팅이 그래도 진입장벽이 낮다는 정보를 얻었다. 영화마케터가 되기 위해서 거의 필수적으로 이수하는 교육과정이 한겨레교육이나 여성영화인모임 등에서 진행하는 영화홍보마케팅 실무 교육과정이어서 나는 한겨레교육에서 곧 개강예정인 강좌를 수강신청했다. 비용은 주 1회 4시간, 총 4회 16시간의 교육이 약 30만원이었다. 대학 등록금도 국가장학금의 도움으로 안 내고 다녔던 내게 비싸다고 느껴졌지만 큰 고민하지 않고 신청했다. 그 돈으로 영화 산업에 대해 알아보고 나한테 안 맞다고 느끼면 미련을 버릴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들을 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매주 12월의 토요일에 신촌에서 수업을 듣고 영화 마케팅 기획서를 만드는 실습을 했다. 한 번에 4시간짜리 수업인데 낮 시간에 진행한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수업을 들었다. 대학교 때에는 점심 먹고 오후 수업만 되면 그렇게 꾸벅꾸벅 졸았는데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배우니까 이렇게 즐겁구나 싶었다. 또한 영화마케터는 보도자료 작성 때문에 글쓰기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가 도전할 만 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종료되고 2021년의 나는 다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백수 상태였다. 영화마케팅 수업이 재미있었지만 여전히 내가 이 길을 준비하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공기업 취준 외길인생이 영화 관련 스펙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 해당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 중 일부와 스터디를 꾸리게 되었다. 스터디장은 영화산업 취업을 나보다 먼저 준비하던 분이었고 주변에도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이 더러 있어서 정보를 많이 알고 계셨다. 덕분에 혼자 취업하려고 할 때보다 훨씬 막연한 마음을 덜 수 있었다. 또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스터디를 하다보니 서로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생겨서 장점만 가득했던 스터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