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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Jul 05. 2021

좋은 귀의 척도. <사운드 오브 메탈>

'듣기'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혼자서 잘 때도 이어플러그를 끼지 않으면 주변의 조그만 소리에도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예민한 편이다. 그런 내가 지난 1년간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거쳐간 세 명의 룸메이트 중 두 명이 코를 골았으니 혼자서 지내는 지금의 삶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룸메이트의 코골이에 괴로워할 때면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제발 잘 때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데 더 안타까운 일은 내가 소리의 유무와 세기에는 예민한 반면 소리를 식별하는 능력은 다소 부족하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명 '사오정' 스타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귀가 밝다는 표현도 그 의미를 잘 가려서 들을 일이다.


또 하나, 나는 어른들 말을 좀체 들어먹지 않는다. 2N년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께서 온갖 강압적인 방식으로 나를 본인 뜻대로 변화시키려 해도 기어이 자기 쪼대로 살고 있음은 물론. 학교에서도 반골 기질을 은근히 티내며 EBS 연계교재 풀라는 국어 선생님의 말씀을 씹고 수학 문제집을 풀었고, 점심 시간에 밥 빨리 먹고 공부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잔소리를 피해 빈 야자실에 몰래 들어가서 낮잠을 자거나 노가리 타임을 가졌다(당시의 나는 너무 버릇없이 굴기는 했다).


듣는 다는 것의 여러 측면을 고려했을 때 나는 과연 '좋은 귀'를 가진 사람일까? 별로 관심 가지지 않았던 '듣기'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사운드 오브 메탈>의 주인공인 '루벤'은 헤비메탈 밴드의 드러머다. 영화는 그래서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으로 시작하고 '루벤'의 격렬한 드럼 연주를 들려준다. 그래서 메타정보가 없는 관객이라면 쉽게 <위플래쉬>처럼 드러머가 주인공인 익사이팅한 음악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루벤'은 영화 초반부터 갑작스레 청력을 잃고 밴드 보컬이자 연인 '루'의 도움으로 청각장애인들이 모여 지내는 공동체에 들어간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며 휴대폰과 인터넷 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어 외부와 격리된 그곳은 청각장애인이 사회적 다수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회적 소수자가 된다. '루벤'의 적응을 돕기 위해 커뮤니티의 리더인 '조'와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한 끝에 청력을 잃고 좌절하던 '루벤'은 어느새 새로운 삶의 방식에 익숙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루벤'은 몰래 인터넷을 사용하며 외부 의료기관과 소통하던 끝에 인공 보청장치를 자신의 귀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청각장애인 커뮤니티를 빠져나와 다시 뮤지션으로서의 일상으로 복귀할 채비를 한다.


'루벤'을 상담하는 '조' (출처=imdb)


그런데 '루벤'이 인공장치의 도움으로 다시 소리를 듣게 되는 시점에서 영화는 급격히 서늘해진다. 전반부의 이야기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은 단연 헤비메탈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다. 그런데 후반부의 '사운드 오브 메탈'은 인공장치가 합성한 날카롭고 거슬리는 가짜 청력이다. 의료기관은 '루벤'에게 인공장치의 이식을 통한 청력의 회복과 일상으로의 복귀를 약속했지만 막상 시술 후에는 인공장치가 외부의 소리를 감지하고 뇌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뇌가 소리를 듣는 착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장치가 구동된다며 슬쩍 말을 바꾼다. 날카로운 기계음에 둘러싸여 일상을 지내기란 힘든 일이고 다시 음악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서 점점 적응했던 '루벤'은 그곳의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의 맡은 역할을 다하며 소통에도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는데, 다시 찾은 외부 세계 속에서 '루벤'은 사람들과의 소통에도 문제를 겪고 밴드에 제대로 복귀하지도 못한다. 청력을 잃고 난 후의 '루벤'보다 인공장치가 이식된 '루벤'의 처지가 더 비참해지는 지점이다. 일전에 '조'는 '루벤'에게 고요함을 받아들일 것을 조언했다. '루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인공 보청장치를 빼버리고 끝내 고요함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확고한 개성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루벤'에게는 외부의 간섭과 참견 역시 많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헤비메탈의 시끄러운 소리는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게 도와준다. 그래서 '루벤'이 청력을 잃은 것은 어쩌면 그의 삶에 큰 변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그는 '듣는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력을 잃는 일은 큰 불행이다(청력을 잃는 일을 큰 불행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일상을 살아가는 청각장애인에게 실례가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내가 사려깊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청력을 잃는 일도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타의 사건들처럼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가 조금 더 빨리 고요함을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 스틸컷(출처=imdb)


이와 관련해서 <나는보리>가 보여주는 청각장애인의 모습은 장애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청각장애인 부모의 자녀 즉, CODA(Children of Deaf Adult)인 '보리'는 비장애인이다. 남동생도 청각장애를 갖고 있어 가족끼리 수어로 소통하는 상황 속에서 '보리'의 마음 속에는 소외감이 스며들게 되고, 급기야 가족들과 동화되기 위해 청력을 잃은 연기를 한다. 어린이의 귀여운 상상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을 보면 앞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처럼 사회적 소수자는 속한 공동체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장애의 유무는 그저 차이일 뿐 우열의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청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운드 오브 메탈>의 '루벤'이 가장 타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던 때는 청력을 잃고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서 생활할 때였다. <나는보리>의 '보리'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가족 사이에서 마음의 벽을 느낀다.


<나는보리>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되게 식상한 표현이지만)경청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을 전부 듣는 것으로 달성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많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는 시도는 과연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상대에 가 닿지 못하는 얕은 발화가 난무하는 지금의 세상은 인공장치로 듣는 날카롭고 거슬리는 '사운드 오브 메탈'로 가득찬 듯하다. 우리는 듣는 일에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의견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시종 관객들의 청각을 예민하게 괴롭히다가 마침내 '루벤'이 만나는 고요의 순간에 관객들을 초대하며 주인공이 얻은 깨달음을 함께 느끼게 한다. 영화를 연출한 다리어스 마더는 영화와 관련해 "We all recognize that deafness is not silence"라는 말을 남겼다. 청력은 '좋은 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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