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는 함께 걱정을 하며 해결책을 같이 궁리했고, 다행히 그 분의 실수가 그다지 큰 실수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서 안도했다. 그런데 그는 분명 괴롭다, 미치겠다 등의 표현을 넘어서 '죽고 싶다'고 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의 상황을 보면서 걱정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그건 정말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 분의 괴로웠던 감정이 사소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죽고 싶으면 그 사람의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진다. 그러니까 '죽는다'는 생각이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내가 그래봤다(는 말 만큼 듣는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주장도 없지만). 사실 나와 제법 오래 전부터 친한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들어 지겹겠지만 나는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미수에 그쳤기에 살아서 이런 잡문을 끄적이고 있지만 당시의 '판단'을 나는 온전히 기억한다.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단 하나의 문제가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오랜 궁리를 했지만 해결책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속에는 많은 상처들이 켜켜히 쌓였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어느날 사소한 마찰이 트리거가 되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그때 내 마음은 지극히 차분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고통과 기쁨을 헤아려 비용-편익 분석을 했을 때 사는 것을 그만두는 일은 내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졌다. 다만 나는 겁이 너무 많아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정도로 개인적 이야기를 줄인다.
영화 <이다>는 제목이 지시하듯 주인공인 수녀(가 되기 전이지만) '이다'의 이야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다'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다. 하지만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부터 '이다'의 이모인 '완다'에 훨씬 강한 인간적 끌림을 느꼈다. 수녀 '이다'의 유일한 혈육이자 전직 판사인 '완다'는 술담배와 섹스에 쩔어 사는, '이다'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다. 나는 둘 중 어떤 라이프스타일이 더 좋은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완다'의 쿨한 성격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완다'는 영화 말미에 창밖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완다'의 퇴장(출처=네이버 영화 DB)
'완다'의 마지막 자살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다. 전날 밤에 바에서 만난 그저 그런 한심한 남자와 의미 없는 섹스를 한 뒤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 홀로 빵에 버터를 발라 우적우적 씹으며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다. 가운 차림의 '완다'는 턴테이블에 주피터 교향곡을 틀어놓고 담배를 태우다 음악 소리를 키우고 외투를 걸친 뒤 담뱃불을 끄고 덤덤하게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앞 문장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린다'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로 바꾸면 그냥 잠시 마실 나가는 사람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완다'의 자살 장면은 예술영화가 으레 그렇듯,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된 영화적 장면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오히려 이 자살 장면이 그냥 너무나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다>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완다'는 '피의 완다'로 불릴 만큼 무자비한 법조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에너지를 사회활동으로 발산할 길이 없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유일한 혈육 '이다'의 부모님 유골을 찾는 일을 도와주고 이를 함께 완수했다. 더이상 그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다'의 부모님 유골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이 맞이한 비극적 죽음의 내막도 알게 된다. 감정적인 충격까지 겹쳐 우울한 심리가 고조된다. 그렇게 고조된 심리는 서서히 가라앉는데 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침전되는 것이다. 감정이 사라지고 나서 이성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죽고 싶다'는 감정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서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완다'는 삶을 통해 누리게 되는 쾌락에도 둔감해진 상황이어서 정말 원초적인 삶의 이유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다>는 '완다'를 입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의 뜬금없어 보이는 자살도 납득시킨다. 어떤 자살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산물이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완다'를 누군가 막아선다면 그는 성가신 일에 잠시 짜증을 내며 비키라고 손짓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을 방법은 알지 못한다. 다만 이성적 판단에 의한 자살도 사실 온전히 합리적인 판단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주장하고 싶다. 우리의 합리성은 제한적이어서 과거의 정보만을 가지고 현재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온전한 합리성에 의해 판단을 내리려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헌데 우리에게는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고 인생은 한치 앞도 모른다.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나처럼)에게는 불확실성이 오히려 낙관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이 비관하는 미래가 정말로 현실이 될 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루만 더 살아보라고, 일주일만 더 살아보라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살아있길 잘했다거나 살고 싶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고 이는 진단과 처방으로 이어지는 건강한 삶을 위한 신호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감정에 의해서든 이성에 의해서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