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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Sep 10. 2021

세 번의 실패, 그 후의 시작. <낫아웃>

야구를 인생에 빗대는 무수한 영화들 가운데서도 빛나는 독립영화

나는 중학교 때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 나가서 친구와 캐치볼을 할 정도로 야구에 빠져 있었고 교내 야구동아리에서 무척 열심히 활동하며 아주 잠깐 야구선수를 꿈꿨었다. 물론, 소심하고 경쟁을 두려워하는 내 천성을 고려하면 야구선수가 되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입시에 몰두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지만 어쨌든 내가 유일하게 애정을 가졌던 스포츠가 야구인만큼 영화에서도 야구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한창 야구를 즐기던 중학생 때 나왔던 故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명승부를 그린 <퍼펙트 게임>(2011)은 내 가슴을 뜨겁게 불지피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같은해 나온 <머니볼>(2011)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작이니 첨언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에 나온 <야구소녀>(2020)는 과연 감독이 여성 투수가 강속구를 뿌리는 성장 서사를 선택할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나에게 너클볼이라는 통쾌한 변화구를 먹였다. 그리고 <낫아웃>(2021)은 내가 봐왔던 몇몇 야구영화 가운데서도 단연 인상이 깊게 남는다.


낫아웃은 야구용어다. 풀네임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인데 사실 미국에서는 이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용어의 기원을 파고들 생각은 없기에 다시 설명으로 돌아가자면 낫아웃은 세번째 스트라이크가 된 공을 포수가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을 때 타자는 삼진아웃 처리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1루로 열심히 뛰어 베이스를 밟으면 세이프가 되는데, 다소 복잡할 수 있는 규칙인지라 영화는 낫아웃 상황을 극중 야구 경기에서 직접 보여준다(덕분에 나도 낫아웃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잊고 지내다가 다시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낫아웃>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영화는 주인공 '광호'가 겪게 되는 상황을 낫아웃으로 표현했다. 프로야구선수를 꿈꾸는 고등학생 '광호'는 세 번 실패한다. 먼저 오랜 꿈이었던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는 일에 실패한다. 야구부에서 단연 돋보이는 실력을 가진 '광호'는 고교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드래프트에서 프로 구단의 선택을 받을 것을 자신한다. 그래서 한 구단의 신고 선수(KBO에 등록되지 못하고 선수로 신고만 되어 있는 경우를 말하며 프로 구단에 계약금 없이 입단해 2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명하는 구단은 아무도 없었고, 뒤늦게 신고 선수라도 받아들이고 싶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


'광호'는 야구를 계속 하기 위해 야구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프로스포츠 세계는 뒷돈이 받쳐주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너무나도 어렵다. 자신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집안에 경제적 여유가 있는 동급생 '성태'는 순조롭게 입시를 진행하지만 '광호'는 형편이 넉넉치 않아서 친구 '민철'의 소개로 불법 휘발유를 파는 일에 발을 들인다. 여기서 '광호'의 두 번째 실패가 발생한다.


<낫아웃>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어릴 때부터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 '민철'과 함께 나름대로 돈을 쏠쏠하게 모아가고 있지만 야구부 감독에게 촌지를 줄 액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광호'는 우연히 '민철'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불법 휘발유 사장의 비상금을 몰래 털자는 위험한 제안을 한다. 하지만 퇴근한 줄 알았던 사장이 다시 돌아오면서 범행은 미수로 돌아가고 사장은 '민철'을 의심하며 폭행을 저지른다. '광호'는 친구의 약점을 빌미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실패하고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실패를 겪는다.


그럼에도 '광호'는 악착같이 모은 돈을 감독에게 건네지만 감독은 되레 성을 내며 '광호'를 쫓아낸다. 촌지 받는 감독 취급한 것에 화가 나서 저러는 줄 알았던 나는 너무나 순진했다. 감독과 면담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광호'가 듣게 되는 액수는 어이없게도 5천만원이었다. '성태'에게는 별 무리가 없는 돈이지만 '광호'는 온갖 발악을 해도 모으기 어려운 돈이다. 실력이 좋아도 경제력의 차이가 앞날을 부당하게 좌지우지하는 상황 속에서 '광호'가 마주한 세 번째 실패는 야구를 계속 하고 싶다는 그에게 삼진아웃을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낫아웃>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그럼 난 어디로 가요?"라고 묻는 '광호'는 영화의 마지막, 인하대학교 야구부에 속해있는 모습을 비춘다. 비록 원래 가고 싶었던 '성대(성지대학교라는 영화 속 가상의 명문대)'는 가지 못했지만 계속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 '낫아웃'이 처음 등장하고 '광호'가 힘찬 기합과 함께 야구부원들과 운동장을 도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 '광호'의 세 번의 실패는 3 스트라이크, 마지막에 띄운 '낫아웃' 타이틀은 심판의 낫아웃 선언, 그리고 타이틀 뒤에 '광호'가 야구를 계속 하는 모습은 낫아웃 선언 이후 타자가 세이프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야구는 인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호'의 야구 인생의 주요 장면을 마치 야구 경기의 한 장면으로, 구체적으로는 낫아웃 상황으로 빗댄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고는 내 인생에서의 거듭되는 실패를 떠올렸다. 내 삶에서 지금껏 겪었던 가장 큰 실패는 단연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다. 짧게는 고등학교 3년의 노력, 길게는 엄마가 나를 홀로 키우면서 쏟았던 모든 노력과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대사건이었다. 그럼 왜 재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재수에 또다시 실패할까 두려웠으며 명문대에 가려는 것은 그저 명문대생 타이틀을 따는 것이 목표였기에 문득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잘난 것 없는 나는 공부라도 잘 해서 명문대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나의 자존감은 극도로 낮아진 채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유년기를 폭압적인 엄마 밑에서 자라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학교와 집 모두에서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극히 적은 내가 자신감 낮은 상태로 대학에 가서 얻는 것은 더 큰 자격지심이었다.


인생에서 내게 주어진 확률 게임은 어쩜 이리도 보상이 박한 것일지 원망이 가득했다. 상극인 엄마, 볼품없는 외모, 소심한 성격에 하는 일도 잘 안풀려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후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치는 일이 있었고, 어찌저찌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둔 덕분에 대학생활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았으나 꾸준히 노력했던 공기업 취업에는 실패하고 영화마케팅 분야로 도망치듯 발을 들였다. 공기업에 들어갔다면 절대 느낄 수 없는 크고 소중한 보람을 느끼고 있지만 극한의 박봉으로 워라밸이 잘 지켜지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 LH매입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저렴한 월세로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출퇴근길 서울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들 중에 내가 가장 경제적으로 무능하구나 싶어 위축되는 순간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했다. sns에서 한껏 위선을 떠는 내 모습이 꼴보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즐겁고 행복하고 과시할만한 순간들을 모아놓은 인스타그램은 자존감 낮은 지금의 내 정서에 너무나 해롭게 느껴져 멀리한 것도 있다. 하필 직업이 영화마케터라 인스타그램을 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부계정을 만들어 배급사와 배우들 계정을 눈팅하며 온라인 마케팅 콘텐츠를 확인하고 있다.


인생은 나한테 무척 버겁게 느껴진다. 군대에서 모두가 빨리 전역날이 오기를 바라듯 나는 무사히 인생을 마감하는 날이 얼른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낫아웃>에서 삼진 후에도 1루에서 생존해 홈베이스를 밟을 준비를 하는 '광호'의 모습을 보니 나의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이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야구를 인생에 빗댄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도 <낫아웃>은 내게 더욱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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