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트랜짓>(2018)과 <운디네>(2020)가 한국에서도 좋은 호응을 얻으며 올해 <피닉스>(2014)가 역주행 개봉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작년 시네필 사이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이었던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이 한국에서 큰 인기 속에 10만 관객을 넘으며 그의 전작 <워터 릴리스>(2007), <톰보이>(2011), <걸후드>(2014)가 잇따라 역주행 개봉하는 일이 있었다(작품 옆의 연도는 제작연도). 그리고 올해 셀린 시아마의 신작 <쁘띠 마망>(2021)이 한국 팬들의 많은 기대 속에 개봉했다.
개인적으로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가져다준 엄청난 감동과 여운에 비해 <톰보이>에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쁘띠 마망>은 딱 <톰보이> 정도의 무난하고 좋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을 작품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쁘띠 마망>은 당초 가졌던 낮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빼어난 솜씨의 작품이었고 영화를 통해 받은 감동과 위로 역시 길고도 깊었다.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높은 도약을 해낸 셀린 시아마의 영화적 수준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쁘띠 마망>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러닝타임으로 보나 영화의 규모로 보나 자그마한(petite) 이 영화는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섬세하게 짜여졌다. 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집이라는 공간의 은유에 주목하고 싶다. 주인공인 '넬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할머니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엄마인 '마리옹'의 어릴적 모습을 만나 엄마가 제대로 들려주지 않았던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인 오두막으로 함께 향한다. 집이라는 공간은 그 사람의 생각과 취향, 생활양식 등의 총체가 집약된 소우주다. 그래서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기에 '넬리'는 할머니의 시골집에 주인의 초대를 직접 받을 수는 없지만 그 집에 같이 살았던 엄마가 동행하기에 초대가 성립하고 할머니와 작별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엄마 '마리옹'의 오두막에 어린 '마리옹'이 직접 '넬리'를 초대함으로써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날 기회를 얻는다. 등장하는 집은 두 개지만 '넬리'는 한 번 더 초대를 받는다. 어린 '마리옹'으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자 '넬리'의 할머니의 집으로 '넬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이 초대로부터 '넬리'가 얻게 되는 기회는 바로 엄마인 '마리옹'과의 작별로 읽힌다.
<쁘띠 마망>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마리옹'은 자신의 엄마이자 '넬리'의 할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 '넬리'의 할머니는 언제고 지병으로 세상을 뜰 것처럼 말하더니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로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마리옹'은 수술이 잘 끝나지 못해 '넬리'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몇 대사들이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아빠가 엄마의 자리를 대신 채워줄 것 같다. 이는 아빠가 '넬리'의 소원대로 면도를 함으로써 턱수염이 상징하는 남성성을 제거하는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쁘띠 마망>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그렇게 두 개의 집과 세 번의 초대로 이뤄낸 '넬리'의 작별은 단절인 동시에 연결을 내포한다. 아빠의 회유에도 '마리옹'의 초대에 응하며 '넬리'가 '다음이란 없'다고 말한 것은 그 자체로 단절의 뉘앙스를 깊이 드러낸다. 하지만 '마리옹'이 '넬리'의 할머니와 있는 집은 곧 '넬리'와 아빠가 있는 집이 되고, '넬리'와 '마리옹'의 마음 속에 서로가 존재하는 것처럼 영화는 연결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소중한 사람과 작별하는 행위를 애써 피하지 않고 제대로 수행하게끔 아름다운 길로 안내한다.
작지만 깊고 섬세한 이 영화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쉽게 극장을 떠나기 어려운 나에게 영화는 엔딩크레딧과 함께 따스한 노래를 들려주며 작별의 기회를 건넸다. 나는 노랫말을 음미하며 비로소 <쁘띠 마망>과 작별하고 셀린 시아마의 다음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이 영화에는 '이별'보다는 '작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작별'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