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남성)에 의해 인형(여성)이 되었던 시대를 지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레오스 까락스의 영화들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불친절한 화법 때문에 대중의 환호와 지지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 역시 하도 난해하다는 평 때문에 <홀리 모터스>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선뜻 관람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아네트>가 최근 극장 개봉했고, 색다른 예술영화에 대한 은근한 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싶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관람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자주 가지 않던 예술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볼 준비를 마친 순간 갑자기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의 타이틀 로고가 뜨지를 않나 곧이어 <십개월의 미래>가 상영되는 것이었다. 내가 상영관을 잘못 찾아갔나 싶어서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알고보니 극장 측의 실수로 영화를 잘못 틀어준 것이었다(두 작품 모두 '그린나래미디어'의 배급작이다).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나니 이미 영화 오프닝에서 레오스 까락스가 주절주절하는 대사의 반 이상을 못 듣게 되었고, 영화를 온전히 처음부터 감상하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화가 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작 부분을 보지 못한 것의 아쉬움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는데, 2시간이 훌쩍 넘는 긴 러닝타임에 중반부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슬쩍 졸아버렸다. 눈 깜빡임을 제외하고 영화의 모든 장면을 온전히 보려는 나의 원칙은 자의와 타의에 의해 깨지게 된 것이다. 비록 영화를 보는 내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네트>는 컨디션이 좋았을 때 봤어도 나한테는 어느 정도 지루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데 마치 레오스 까락스가 담배를 후후 피우면서 온갖 투머치 토크를 늘어놓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종국에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던져주면서 '그래도 좋은 영화였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해주었다. 지금부터 본론.
So May We Start
<아네트>에서 주인공 '헨리'와 '안'의 딸인 '아네트'는 영화에서 내내 목각인형으로 나온다. 소위 불쾌한 골짜기를 떠올리게 하는 비주얼은 감상에 불편을 초래해서 굳이 저렇게 해야 했을까 싶은 의문을 들게 했다. 그 '아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인형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제서야 '아네트'를 내내 인형으로 설정했던 것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다.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주인공 '헨리'는 잘나가는 코미디언이다. 영화 초반에 그가 보여주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는 그 내용 뿐만아니라 배우의 놀라운 연기가 더해져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그 쇼에서 '헨리'가 왜 코미디언이 되었는지 이유를 밝히는데 그 점이 영화의 핵심이다.
'헨리'는 이 말을 뱉고는 총살 당하는 연기를 능청스레 선보이고 퇴장한다. 그는 쇼를 마친 뒤 오페라 가수이자 연인 '안'에게 돌아가 관객들을 완전 죽여놨다고 말하는데, '안'이 공연 속에서 내내 죽는 역할을 맡는 것과 대조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연에서 맡은 설정의 대립항이 곧 영화 전체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헨리'의 첫 번째 살해는 연인 '안'을 죽이는 것이다. '안'은 꿈 속에서 '헨리'와의 교제 중에 학대를 당했다는 여성들의 증언을 보게 된다. '헨리'에 대한 #metoo를 알게 된 '안'은 '헨리'에 의해 살해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헨리'의 두 번재 살해는 동료이자 '안'과 각별한 관계였던 '지휘자'를 죽이는 것이다. '지휘자'는 '헨리'가 '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역시나 '헨리'에 의해 살해되어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안'처럼 물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살해는 '아네트'에 의해 정지된다. '헨리'가 '지휘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네트'가 알게 되는데, 진실을 아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헨리'조차 딸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선택한 방법은 자기 멋대로 세상에 꺼내놓은 딸의 삶을 다시 자기 멋대로 감추는 것이다. 빛을 비추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어린 '아네트'를 세계 각지를 돌며 공연하게 하는 아동착취를 벌이더니 '아네트'가 진실을 알게 되자 딸의 은퇴를 발표한다. '아네트'는 은퇴 전 마지막 공연을 하이퍼볼 하프타임(사실상 슈퍼볼 하프타임을 묘사한)에서 갖게 되고 그 자리에서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
'헨리'는 그동안 지은 죄로 수감된다. 교도소로 가는 길에 '헨리'를 향해 가해지는 비난 중 'Stop Femicide'라는 피켓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헨리'는 면회를 온 '아네트'에게 많이 변했다는 말을 건넨다. 영화는 그제서야 인형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한 '아네트'를 보여준다. 이는 '아네트'가 변한 것이 아니라 '헨리'가 '아네트'를 그간 인형으로 취급한 것임을 상기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의 남성이 바라보는 딸은 그저 귀여운 인형이겠으나 수감되어 거세된 남성은 그제서야 색안경을 벗는다. 면회가 끝나고 교도관에 의해 퇴장하는 '아네트'의 마지막은 앞모습, 면회실에 남은 '헨리'의 마지막은 뒷모습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렇게 종료된다.
이 영화는 극 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레오스 까락스 본인의 심연을 꺼내보이는 행위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간 작품을 통해 꺼내보였음에도 관객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답답해하는 마음이 '헨리'가 관객들이 '심연(abyss)'의 철자를 알아듣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장면으로 어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음악'이었나보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은 이해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평론가들도 저마다 다른 해석과 감상을 내놓았다. 나 역시 어느 한계를 느끼고 내가 이해한 선에서의 해석을 꺼내놓을 수밖에. 페미니즘에 기반한 해석은 수많은 해석 중 하나일 것이고 레오스 까락스의 의도와 닿았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쩌면 난해하고 어렵게 말하는 일은 레오스 까락스 본인이 선택한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네트'가 빛을 비추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내듯 영화라는 빛을 보고서는 끝내 진실을 찾아서 말하고야 마는 관객이 있을 것이다. 심연을 마주하지 말라는 '헨리'의 가스라이팅에도 굴하지 않고 말이다. 내가 찾은 진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아네트'의 앞모습과 고개를 숙인 뒷모습의 '헨리'를 보여준 마지막 시퀀스다. 비로소 사람(남성)에 의해 인형(여성)이 되었던 시대는 과거의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여성들은 살아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사람(남성)에 의인형(여사람(남성)에 의해 인형(여성)이 되었던 시대를 지나성)이 되었던 시대를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