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인물들의, 그리고 감독의 소통 방식을 헤아려보는 글
2021년 영화계를 논할 때 클로이 자오를 빼놓고는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도 상반기에는 걸출한 예술영화로 아카데미를 비롯해 각종 시상식을 휩쓸더니 하반기에는 마블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로 찾아왔으니 말이다. 한 명의 감독이 한 해에 보인 행보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갈 지(之)자 행보다. 상반기의 바로 그 <노매드랜드>는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고루 얻었지만 같은 감독이 하반기에 선보인 <이터널스>는 평단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관객의 혹평에 둘러싸이며 클로이 자오는 올해 냉탕과 온탕을 극적으로 오가는 중이다.
화자는 언어를 통해 청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소통을 하는 것처럼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영화에 반드시 메시지나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과는 다르다). 그래서 영화는 일종의 언어라고 볼 수 있는데 클로이 자오가 사용한 <이터널스>라는 언어는 적절한 소통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은 클로이 자오의 실패를 진단하는 글이 아니라 이해하고 옹호하는 글에 가깝다. <이터널스>의 관객들과 <노매드랜드>의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했던 감독의 언어를 <노매드랜드>의 관객이 헤아려보는 글이다.
우선 <이터널스>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터널스>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의 인물들이 등장함에 따라 듣게 되는 언어도 영어 한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귀로 듣는 언어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언어, '수어'도 등장한다. 빠른 스피드를 초능력으로 가진 이터널스 '마카리'를 연기한 배우 로런 리들로프는 실제로 청각장애를 가졌고 수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마카리' 역시 수어를 사용하는데, 수어도 국가별로 다르므로 '마카리'는 로런 리들로프가 평소에 사용하는 미국 수어를 사용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 영화가 반가운 것은 그저 청각장애를 가진 히어로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카리'가 다른 동료들과 소통을 나누는 것이 묘사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는 '마카리'의 수어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이 수어를 배우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 수어를 배우기를 거부한다든가 수어를 익히는 도중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나오지도 않는다.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마카리'의 수어를 알아듣고 수어로 대화를 나눈다.
극중에서 '이카리스'가 '세르시'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족들의 언어를 익히려는 모습이 나오는 것처럼 이터널스들은 동료인 '마카리'와의 건강한 관계맺기를 위해 자발적으로 수어를 배웠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지점에서 <이터널스>가 언어를, 그리고 언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다루는 사려깊은 방식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비록 미국 영화지만 전세계에 수출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터널스> 속 다채로운 언어들과 인물들의 소통 방식은 그야말로 바람직하고 미래지향적이다.
다음은 클로이 자오가 <이터널스>라는 언어를 통해 영화 바깥의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이야기할 차례다. 아쉽게도,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다양한 언어로 원활히 소통하는 것에 비해 감독이 관객들과 영화로 원활히 소통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원인은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에 예술영화의 dna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 사용에 비유하자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일종의 '콩글리쉬'가 나온 셈이다.
히어로 영화, 특히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주는 무난한 스토리텔링과 적재적소의 스펙터클 그리고 간간히 등장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할 것이다. 상업영화는 으레 그렇겠지만 마블 역시 특유의 흥행공식으로 영화를 제조하고 품질 검수를 거쳐 안정적인 완성도의 작품을 찍어낸다. 나도 마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마블 영화는 볼때마다 어째 대기업의 공산품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마블 영화의 '아는 맛'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예술영화의 화법이 영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클로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도 보여줬듯이 자연의 광활함과 웅장함을 찬찬히 담아내는 촬영은 그저 지루하게 느껴지고, 우리가 마블 영화를 보러 왔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러 온 것이 아니잖느냐는 항의를 유발한다. 셀레스티얼을 화면 가득 띄워놓는다든지 '세르시'가 손 닿는 물질의 물성이 변하며 꽃과 새로 변하는 모습은 나름의 스펙터클이지만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는 마블 팬들에게는 시큰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업영화 답지 않은 느린 진행방식은 쉽게 졸음을 유발한다.
그렇다고 예술영화를 선호하는 관객들이 <이터널스>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이터널스>는 그 바탕을 상업영화인 동시에 마블 영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소한 유머가 등장하고, 기승전결의 흐름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며 대사들도 곱씹을만한 것은 별로 없고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흡수된다. 소위 시네필이 만족하려면 감독의 고유한 개성이 드러나면서 사유의 깊이와 높은 작품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이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블 영화들에 크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던만큼 <이터널스>를 많이 보러 올지도 미지수지만 '클로이 자오'의 이름을 믿고 보러 온 일부의 관객들도 최소한의 실망을 안고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클로이 자오는 상업영화에 예술영화를 접목한 영화를 내놓았다. 하지만 기존의 마블 팬들에게 오락적 만족감을 주면서도 자신의 비전을 전하는 설득의 화법은 먹히지 않았다. 역시 마블 영화는 감독의 개성을 어정쩡하게 넣느니 총괄 프로듀서인 케빈 파이기의 지휘 하에 몰개성의 제품들로서 출시되는 편이 흥행에 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매드랜드>도 좋게 보았고, 마블 영화도 평소에 좋아했던 나는 <이터널스>를 재밌게 본 소수의 관객 중 하나인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쉽다.
<이터널스>의 안에서는 언어가 물 흐르듯 흘렀지만 밖에서는 흐르지 못하고 고여버렸다. 마블 영화의 장점과 예술영화의 장점을 둘 다 맛볼 수 있어서 좋았던 나같은 소수의 관객이라도 클로이 자오의 언어를 받아들여 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샘이라도 파놓아 졸졸졸 흐를 수 있게 하고 싶어서 이렇게 몇 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