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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Nov 22. 2021

No Crying <프렌치 디스패치>

만약 영화가 사라진다면 이렇게 작별해줘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는 갑작스럽게 마지막 발행본을 준비하게 된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의 4가지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4:3의 화면비에 수직과 수평의 구도를 그야말로 종횡무진 오가는 구도 미장센과 시대의 질감까지 담아내는 색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영화만의 고유한 특징 역시 도드라지는데, 영화를 마치 잡지 보는 것처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화면 안에 이미지와 (자막 이외의)활자가 나란히 보이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카툰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마 이 영화의 네 이야기가 다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각자의 눈길이나 마음을 사로잡는 한 꼭지는 분명 있을 것이고 잡지 형식으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 역시 뒤따를 것이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접목한 새로운 형식적 시도에 대해 감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준비처럼 느껴져 한 편으로 씁쓸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반드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극장에서 봤고 좋은 영화적 체험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반드시 극장에서 보지는 않아도 되고 오히려 개인 모니터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잡지처럼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 영화를 노트북이나 태블릿PC에서 마치 e-book 보듯이 보는 상상을 했고 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OTT서비스에 풀린다면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비슷한 감정을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면서 느꼈다. 후천적으로 청력을 잃은 주인공이 청력을 보조해줄 인공장치를 끼우고 생활하는 상황에서 인공장치의 삐익대는 기계음을 영화는 생생하게 재현한다. 그 기계음은 극장에서 듣는 것보다 오히려 이어폰으로 들었을 때 관객들이 느끼는 몰입도가 더 클 것이다. 실제로 <사운드 오브 메탈>은 아직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OTT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공개됐다. 나에게는 이것이 영화가 극장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방식을 도모하려는 신호탄처럼 다가왔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프렌치 디스패치>는 어느 잡지의 마지막을 다루면서 동시에 어느 시대에 대한 작별을 고하며 향수를 일으킨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이전 작품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느껴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느 잡지의 마지막이 영화 매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요즘의 영화 시장은 그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이다. 기존 팬층이 탄탄한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 영화는 코로나 시국에도 손익분기점을 상회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팬층을 쌓아올린 감독들의 신작 역시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혹은, OTT서비스를 통해 좋은 감독들이 역량을 펼칠 기회가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있다(겉으로는).


하지만 신인 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는 점점 위축되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국내 감독들이 자신의 첫 작품을 선보이는 장(場)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영화계는 적은 관객수로 인해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1만 관객을 넘는 작품들은 이전보다도 더 손에 꼽히는 흥행작이 되었고, 사실상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지원금을 받으며 공적기금에 의해 손실을 보전하는 상황이다. 물론 독립영화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그 생존이 보장받기 어려운 작품이기에 공적기금이 투입되는 것이 문화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체적인 수익성이 너무 떨어지면 자생력이 위축된다. 특히 정권이 바뀜에 따라 특정 정치성향의 영화들에 공적지원이 제한되는 것을 이전의 사례들을 통해 지켜봐왔다.


이대로라면 이미 성공한 감독의 영화, 혹은 상업성이 짙은 영화들만 계속 창작의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에서, OTT에서 다양한 영화를 만나겠지만 그 영화들은 결국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소제목을 '만약 어느 영화가 사라진다면 이렇게 작별해줘' 라고 고쳐써야겠다. 돈이 되는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만 놓고 보더라도 제2의 박찬욱, 봉준호가 등장하기 어려운 토양으로 바뀌고 있다. 그렇다고 극장에 발걸음을 끊고 OTT로 향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전국의 인터넷 선을 모조리 끊는 新 러다이트 운동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혼자 상상을 해봤다. 조금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렌치 디스패치> 스틸컷(출처=네이버 영화 DB)


그래서 만약 어느 영화가 사라진다면, <프렌치 디스패치>가 해냈던 것처럼 멋진 작별을 고했으면 좋겠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편집장은 "No Crying"이라는 말로 상대방의 슬픈 감정을 일축한다. 쌀쌀맞은 두 마디가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별 앞에 놓인 두 마디는 오히려 좋은 이별을 위한 단순하고도 강렬한 지침이 된다. 장자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지금쯤 아내는 천지(天地)라는 큰 거실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걸세. 만약 내가 통곡을 하면서 울게 되면, 천지간에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 되겠는가"라며 물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결의 영화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면, 울지 않기로 하자. 대신 우리의 실패를 껴안고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자. 우리의 만남은 좋은 만남이었으니, 좋은 작별을 하도록 애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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