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홍상수가 아닌 연상호의 길에 접어들다.
정가영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감독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정가영 감독의 작품 보고 좋았다거나 취향에 맞았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나는 정가영 감독이 '여자 홍상수'라고 불리고 그간의 작품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해왔다는 점 정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내 왓챠 예상별점이 하나같이 낮게 나왔고, 자고 싶다고 말한다느니 유부남이 좋다느니 하는 시놉시스는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에 내게 정가영 감독은 그저 이름만 아는 상태로 머물렀다.
그러던 중에 연말 맞아 개봉하는 흔해빠진 로맨틱 코미디처럼 생긴 <연애 빠진 로맨스>라는 작품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근데 웬걸 주인공으로 전종서 배우가 나온다는 것이다. <버닝>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헐리우드 영화까지 진출한 분이 왜 이런 시덥잖아 보이는 영화에 주연이 된 것일까 의문이었다. 여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로코(로맨틱 코미디)' 한 편 쯤은 있어야 대중의 친근감을 살 수 있다는 소속사의 모종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 안타까움 한 스푼 흘리고 지나쳤다.
하지만 <연애 빠진 로맨스>는 개봉이 가까워지자 내 시야에 들어왔다. 왜냐면 감독이 정가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홍보마케팅 과정에서 정가영 감독을 일절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이 웃프게 느껴졌다. 사실 정가영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나 유명한 감독이지 일반 대중에게는 완전히 낯선 감독이다. 그리고 흔히들 독립영화라고 하면 재미없고 불친절한 화법을 떠올릴테니 독립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졌다는 점을 내세우는 것도 연말 데이트무비로서의 세일즈 포인트로는 적절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이름을 딴, 무척이나 독립영화스러운 원래 제목이었던 <우리, 자영> 역시 제목만 들어도 어떤 효용을 얻을 수 있을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연애 빠진 로맨스>로 바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마케터로서 느낀 점이 많은 사례였다.
어쨌든 멜로/로맨스 장르에 유독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영화에 호기심이 동했고, 그래서 그 전에 정가영 감독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왓챠에 공개된 그의 전작들을 훑어봤다. 아, 정가영 감독은 내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조인성도 재밌다고 밝힌 <비치온더비치>는 그래도 소박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작 <하트>는 너무 지루하고 시답잖아서 발톱을 깎으면서 봤다. 단편들은 잠깐의 시간동안 적당히 재치있고 적당히 뻔뻔하고 거기까지였다. 정가영 감독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출연한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관종이고(이건 칭찬이다), 시종 뻔뻔하게 구는데 얼척없고, 무수한 대사들은 야한 말 하기 좋아하는 중학생의 그것처럼 듣는 즉시 휘발된다.
하지만 이번 <연애 빠진 로맨스>는 정가영 감독의 개성을 많이 덜어내고 상업영화의 미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우선 여자 주인공의 자리는 감독 본인 대신 전종서 배우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저 '우리'가 손에 쥔 뮤지컬 티켓의 제목('비치온더비치')이나 '자영'의 방에 붙어있는 <밤치기> 포스터를 통해 이 영화가 본인의 영화라는 표식을 이스터 에그처럼 심었을 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대사로 거의 모든 서사를 채워 인물의 특징과 내면을 표현해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얻어냈던 면모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탐색하고 사랑에 빠지다 갈등을 겪지만 이내 진심을 확인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성애 로맨스 영화의 전형적인 기승전결을 따랐다. 여자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들이대고 야한 말을 쏟아내던 특징 역시 적당히 예쁘장하게 수위가 조절됐다.
그래서 정가영 감독이 이 영화를 기점으로 독립영화라는 울퉁불퉁 오프로드 대신 상업영화라는 잘 닦인 아스팔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출연진은 인지도 있는 배우들로 채워졌고, 음향과 촬영 등이 훨씬 깔끔해져 그야말로 때깔이 달라졌다. 고유의 개성은 사라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준수한 흥행세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유명한 감독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제 홍상수의 커리어가 아니라 연상호의 커리어와 비슷한 길로 접어든 것이 아닐까 싶었다.
홍상수 감독은 국제영화제에서 매번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평단의 꾸준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예술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낮은 제작비로 작은 규모의 영화만 만들어왔기 때문에 배급 규모도 소박하고 관객수도 작품당 몇만 명에 그친다. 반면 연상호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의 작품들을 특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다. 평단의 지지와 수상 실적이 뒤따르는 등 작품성은 있지만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있는 영화를 내놓더니 어느날 대뜸 상업영화에 데뷔하는데 그게 <부산행>이다.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톤은 희석되고 많은 대중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됐다. 블록버스터인만큼 적재적소의 액션이 볼거리를 선사했고, 여성과 아이는 살린다는 상업영화의 불문율을 충실히 따랐다. 이후 공개한 <반도>와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상호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정가영 감독도 상업영화 데뷔작에서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정가영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오프로드에서 아스팔트로의 이러한 노선 변경은 독립영화 팬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일이나 창작자에게는 분명 경제적으로나 인지도 상승 면에서나 소중한 기회일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홍상수 감독은 문화예술계에서 이름난 집안의 출신이라 소위 금수저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남 눈치 안 보고 흥행 신경쓰지 않고 만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둥바둥하면서 본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Nothing Serious'라는 영어 제목이 붙은 이 영화를 보고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진 것 같아 머쓱한 마음이 든다. 밝혀두자면 영화는 충분히 재밌었고 오히려 정가영 감독의 독립영화 시절의 작품들보다 더 취향에 맞았다. 그저 그가 보여준 기존의 행보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출발을 포착하게 된 재미를 느껴서 글로 풀어낼 뿐이다. 독립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배우나 감독 등이 상업영화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내심 '홍대병'이 도지지만 반가운 마음이 크다. 창작자들의 개성을 마음껏 뽐내는 산실인 독립영화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효용을 줄 수도 있다는 근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독립영화계에서 성실히 활동하는 창작자들이 상업영화에서도 더 많은 기회를 얻어서 대중들에게 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되고 창작자들도 더 많은 몫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