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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Jan 02. 2022

새해를 맞아 다시금 생각나는 <아워 바디>

엄마, 나 시험 준비 안 한다고오오~!!

**스포일러 있습니다.


<아워 바디>(2019)는 '멈추고 싶은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메인 카피 등 톤업된 선재를 통해 불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청춘이 러닝을 통해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배급사가 홍보 과정에서 내세운 키워드도 '이 시대의 청춘들을 위한 터닝 포인트 드라마'다. 하지만 영화는 러닝을 통해 건강한 몸을 갖게 되어도 현실이 하나도 바뀌지 않는 울적한 내용으로 채워져 실관람객의 당혹감을 샀더랬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이 너무 좋았다. 주인공의 상황에 공감했음은 물론이고 염세적인 내 가치관과 맞물려 결말까지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워 바디>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주인공 '자영'(최희서)은 명문대를 나왔지만 행정고시 장수생이어서 이제는 반 포기상태로 저임금의 사무직에 그것도 계약직으로 근무한다. 그러다 우연히 건강한 몸으로 달리기를 하는 '현주'(안지혜)를 만나게 되고 러닝 크루에 들어가 달리기를 시작한다. '자영'은 러닝을 통해 피로에 찌든 몸과 마음의 고시생에서 벗어나 생기가 감도는 모습으로 점차 변화한다. 러닝을 하지 않을 때에도 밝고 자신감있는 모습을 장착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이제 '자영'이 뭐든 희망찬 내일을 만들어가리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후 펼쳐지는 광경은 '현주'가 자신의 눈 앞에서 러닝을 하다 교통사고로 죽고, '자영'이 러닝을 통해 가꾼 몸으로 같은 크루원과 섹스를 하며 진로는 여전히 불투명해서 엄마는 여전히 고시 준비에 매진해보라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것 말고 영화가 더 들려주는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네이버영화에 들어가보면 이 영화에 관객들은 '희망과 용기는 커녕 기승전섹스', '주인공이 가진 아픔에 공감하며 용기를 얻고싶어 보러간 영화였는데, 영화소개 정보들과는 다른 영화 내용에 당황스러웠'다는 등의 소위 '낚였음'을 호소하는 댓글을 달았다. 영화마케터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보고 나면 더 꿀꿀해지는, 그러나 독립영화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낸 영화를 '꿈, 희망, 위로, 청춘' 등의 키워드로 애써 포장해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배급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이 해프닝은 지금의 청춘에게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희망과 위로를 강요하는 세태가 만들어낸 촌극 같다.


<아워 바디>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겪고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혹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험준한 산악을 등정하는 것처럼 극기(克己)의 체험을 통해 자아를 찾고, 내가 뭐든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과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은 독립시행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강인한 정신력이 범사의 문제를 헤쳐가는 데 도움이 되니 상관관계 정도는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꾸준한 운동을 통해 세로토닌 분비가 활발해져 정신도 맑아지고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식상한 얘기도 꺼낼 수 있겠다. 그럼 뭐... 고시 합격자들은 죄다 헬창이게?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고 에디슨이 그랬다. 100%의 완성을 위해서는 1%의 영감이 필수적인데, 노력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영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시 합격은 타고난 머리가 좋아야 하고, 돈을 많이 벌려면 타고난 사업 수완이 좋아야 하는 것이다. 극히 일부만이 저세상의 노력으로 재능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극히 일부의 사례를 앞세워 노력의 가치만을 주구장창 이야기한다. <아워 바디>는 이러한 프로파간다에 카운터를 먹이는 영화다. '자영'은 꾸준히 러닝을 했고 그 결과로 건강한 몸을 얻었다. 그리고 러닝을 통해 앞날이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여전히 그는 명문대 타이틀이 오히려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행정고시 장수생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내 몸 뿐인, 지극히 정직한 인풋과 아웃풋의 함수다.


<아워 바디>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나에게는 영화를 보고 러닝 크루에 들어가서 꾸준히 러닝도 하고 적적한 취준생 시절에 여러 사람들과 만나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는 변화가 찾아왔다. 러닝 크루 활동을 한 것이 참 잘한 선택으로 느껴질만큼 좋은 변화였다. 모습이 조금 더 밝아지고 몸도 더 건강해지는 등 '자영'이 겪은 일을 나도 겪었다. 하지만 당시 준비하던 공기업 취업에는 실패했고,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인 영화마케팅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퇴근 후나 주말에라도 시험공부 해서 다시 공기업 준비하라는 말을 잔소리로 늘어놓는다. '자영'이 겪은 일과 다를 바 없는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훌륭한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영화적으로 풀어내 오히려 현실에 가닿는다는 점에서 <아워 바디>는 내게 유독 기억에 남는 좋은 영화다.


새해를 맞아 엄마가 내게 묻는 새해 계획도 사실은 답정너다. 그러니 내 새해 계획에, 건강도 잘 챙기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픈지 고민하는 것은 있어도, 시험 준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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