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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May 17. 2022

시인의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삶과 노래가 일치하는 사람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에서 주인공 '양미자'는 시를 배우면서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려워요.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에 대해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시는 마음의 투명한 재현을 추구하는 1인칭의 독백이다. 시에 어떤 화자가 등장하건 그는 곧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삶에서 진실한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삶과 시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하며 해석을 대체한다.


최근에 홍상수 감독의 <소설가의 영화>가 개봉했다면, 나는 '시인의 영화'라고 부를만한 영화를 만났다. 포크 가수 정태춘의 음악적 여정을 담은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그것이다.




1978년에 데뷔한 정태춘은 데뷔와 동시에 독보적 서정성을 지닌 음악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영화에 흘러나오는 '시인의 마을'을 듣자면 왜 정태춘이라는 가수가 당대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첫 기타 반주부터 이미 청자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한 데다, 담백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가사 역시 일품이다.


https://youtu.be/GuUMLJQw4KU

'시인의 마을'


수준 높은 한국적 포크 음악을 선보이며 대중가수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진 그는 그러나 이미 '시인의 마을'에서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나는 日沒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이라는 가사를 적어냈다. 그가 앞으로 걸어갈 고단한, 그러나 진실한 삶의 여정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얘기2'는 그 서막을 알리는 노래다. 노래 속 가사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를 주목해야 한다.


https://youtu.be/mA0hytGRqHY

'얘기2'


정태춘은 당시 군부독재의 삼엄한 대중문화 검열을 피해 그의 음악적 동지이자 아내 박은옥과 함께 전국의 소극장을 돌며 '얘기노래마당'이라는 공연을 다녔다. 그 밖에도 청계피복노조 일일찻집에 무료공연을 다니면서 노동운동에 '눈을 뜨고' 전교조 합법화 운동, 정치폭력과 고문에 의한 희생자 추모공연 등 투쟁의 현장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사회참여적 가수가 되었다. 영화 속 인터뷰에서 "나한테 준비되어 있었던 길이라고 생각해"라며 담담히 밝히는 정태춘에게는 당시나 지금이나 투쟁의 현장에 뛰어든 것에 대해 어떤 망설임도 후회도 없어 보인다.




그의 사회참여적 행보 중 가장 많이 회자되면서 또렷한 승리의 기록으로 남은 일은 '가요 사전검열 철폐운동'이다. 정태춘은 1990년에 앨범 [아, 대한민국...](국가 예찬적인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의 제목을 비튼 탄식조의 제목이 백미다)을 정부의 사전검열을 피해 비합법 음반으로 발표하게 된다. 공개적으로 비합법 음반 판매현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그야말로 정부를 들이받는다. 정부는 여론이 악화될까 우려되어 법정으로 이슈를 끌고 가지 않았지만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연이어 비합법 음반으로 발표하고, 정부는 기어이 정태춘을 법률 위반으로 기소한다. 당시 법률지원에는 노무현과 천정배 변호사가 함께했다. 표현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정태춘의 투쟁은 숙의의 장을 만들었고, 서태지의 '시대유감' 사전검열이 팬들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온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가요 사전검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https://youtu.be/B1ZAVFLS3eU

'우리들의 죽음'. 사회참여적일 뿐 아니라 아픔에 공감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끼게 해주는 박은옥의 목소리가 담긴다.


가요 사전검열이 폐지된 1996년을 지나 맞이한 1997년은 IMF였다. 자본의 장난질로 대한민국은 국가 부도의 날을 맞이했고, 그 시기는 사회주의 실험 역시 실패로 끝났던 때였다. 거리에서 혁명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정태춘은 자본주의 체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로 남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아치의 노래'에서 '너의 이념은 그저 너를 깊이 상처낼 뿐이야라고 말한다'는 가사는 우연이 아니다. 정태춘이 함께한 투쟁의 결과는 IMF사태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고,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래만이 그와 대한민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쉬운 정리해고와 기계적 능력주의, 낮은 급여의 비정규직 등 지금도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그림자를 정태춘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https://youtu.be/Zxlf0uwyiDE

'아치의 노래'


시간이 지나 정태춘은 자신의 고향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에 참여한다. 이번에도 정태춘은 "가봐야지"라는 한 마디 말과 함께 망설임 없이 투쟁의 현장으로 향한다. 정태춘이 맞서야 할 상대는 공교롭게도 가요 사전검열 철폐운동 당시 뜻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천정배는 법무부장관이 되어 있었다. 얄궂은 운명 앞에서도 정태춘은 사사로운 감정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고, 현장의 예술인들과 문예공동행동을 결성하여 유의미한 아카이브를 남겼다. 그러나 역시 정태춘의 투쟁은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그는 현장에서 경찰 병력에 연행되어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세상과 불화한 정태춘은 오랫동안 노래 만들기를 그만둔다.


https://youtu.be/1QjHgqcpmGQ

'저 들에 불을 놓아'


이윽고 영화가 향한 곳은 정태춘과 박은옥의 데뷔 40주년 기념 프로젝트. 정태춘과 박은옥은 40주년을 기념해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고, 이 과정을 모두 따라가는 영화는 전국에 있는 세대별 팬들의 다양한 사연을 만난다. 그중에서 당시 청소년 인권활동가였던 이수경 님의 사연은 내가 가장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의 현장에서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처음 접한 이수경은 지금도 적확하게 유효한 가사들에 놀라 정태춘의 음악을 파고들게 된다. ' 기자들을 기다리지마라',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는 가사가 지금도 유효한 것은 실은 시대와 사회의 불행이다.


https://youtu.be/D0e-KQnUkk0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는 문명이 고도화된 사회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화폐와 이자 제도가 없는 사회, 문명의 마수가 미치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가 있다면 선뜻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는 정태춘은 여전히 누구보다 젊고 치열하다. 자신과 함께 투쟁한 386 세대가 어정쩡한 도덕과 확실한 기득권을 틀어쥐며 반성을 모르는 채 타락한 586이 된 것과 비교하면 그의 불변함은 더욱 소중하다. 초반 장면에서 후배에게 "반말 팍팍 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정태춘은 오히려 더 진보하는 방향으로, 성찰적으로 변화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정태춘을 아는 사람도, 나처럼 정태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걸출한 노래와 진실한 투쟁의 과정을 좇으며 정태춘이라는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존경하게 만든다. 정태춘은 분명 시인이다. 도저히 자신이 낸 작품과 동떨어진 삶을 살 수 없었던, 앞서 소개한 명제에 따르면 삶과 노래가 일치하는 사람. 40년 전에 데뷔한 정태춘의 텍스트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차고 넘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불행일지도 모르지만.



*글 속 유튜브 링크의 출처는 정태춘 박은옥 정새난슬 유튜브 채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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