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치욱 Dec 29. 2021

예민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돈 룩 업>

기후위기가 걱정이라면, 지금 당장 봐야 더 재밌는 영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멋진 각본으로 흡인력 있으면서도 입체적으로 그린 <빅 쇼트>(2016)의 아담 맥케이 감독이 돌아왔다. 그것도 넷플릭스라는 백그라운드에 힘입어 초호화 출연진과 함께 혜성 충돌이라는 소재의 빵빵한 스케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 혹은 두려움이 동력이 되는 SF영화라기보다는 재난영화에 가깝다. 영화는 천문학과 대학원생과 담당 교수가 지구를 파괴할 혜성이 다가온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지만 누구도 여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로그라인만 보면 과학자의 경고를 무시해서 발생되는 인재(人災)를 그린 <투모로우>(2004)나 <해운대>(2009) 류의 재난영화처럼 보이지만 그처럼 단순하고 안전한 흥행공식을 따른 영화는 결코 아니다.


<돈 룩 업>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돈 룩 업>의 두 주인공, 천문학과 대학원생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와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경안정제 자낙스(Xanax) 없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는 불안장애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안장애의 증상 중 하나는 주변 상황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다는 것이다. '디비아스키'와 '민디'의 불안장애는 별 거 아닌 상황에서 '급발진'을 하거나 한 알 남은 자낙스를 몰래 가로채며 아옹다옹하는 등 코믹한 상황 설정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들이 갖고 있는 '예민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디비아스키'와 '민디'는 지구 종말을 앞두고도 히히덕거리는 토크쇼 진행자들 앞에서 버럭 화를 내며 이거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들은 웃고 넘길 상황에서 쓸데없이 예민하게 군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예민한 사람들은 직감이 뛰어나고 세상을 통찰하는 눈이 있기 때문에 종종 세상의 변화에 앞장서곤 한다. 둘이 일으킨 변화는 과학자여서가 아니라 예민한 사람이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돈 룩 업>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들은 세상에 중요한 파문을 일으켰지만 자본의 탐욕과 정치의 나태함, 미디어의 무책임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지구종말을 막는데 실패한다. 정치적 여론 반전을 꾀하는 집권 여당에 의해 혜성 충돌을 막는 계획의 추진이 급물살을 타지만 혜성의 궤도를 틀기 위해 발사된 로켓은 대기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내 지구로 복귀한다. 대형 IT기업의 수장이자 정치권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갑부가 혜성 안에 있는 막대한 양의 광물이 엄청난 부를 창출할 것이라며 혜성을 지구로 안전하게 착륙시켜보자고 주장한 것이 그 이유다.


이 대목에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자본과 권력의 행태에 대한 통렬한 은유와 비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득권은 기후위기마저도 어떻게하면 정치적/경제적 이익 형성에 도움이 될지를 끊임없이 골몰한다. 그래서 '녹색', '탄소중립' 등의 구호는 넘쳐나지만 실제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국가적으로 진행된 것은 뭐가 있나. 그리고 기업들은 지구를 위한 변화에 함께한답시고 기존 제품을 없애지 않고 친환경 제품군을 만들어내면서 또다른 소비행태만 부추길 뿐이다. 바다에 버려질 쓰레기만 늘었다. 혜성 충돌을 전면적으로 막지 않고 어떻게든 경제적 이익을 뽑아내려는 행위와 기후위기를 전면적으로 막지 않고 '그린 워싱'하면서 챙길 잇속 다 챙기는 행위의 대립항이 기가막히게 조응한다.


<돈 룩 업> 스틸 컷(출처=네이버 영화 DB)


영화에서 혜성을 안전하게 착륙시켜 광물을 캐내려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담보로 한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소수의 자본과 권력은 냉동된 채 우주선을 타고 지구의 환경과 비슷한 곳으로 도피한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고도가 낮은 지역부터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러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본을 이용해서 기후위기의 영향을 최대한 덜 받는 곳으로 대피할 것이다. 결국 고도가 낮은 곳에 삶의 터전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사람들부터 죽을 것이다. 척박해진 환경 속에서 양극화는 극심해질 것이고 행복한 삶은 극소수의 기득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건강한 변화를 위해서라도 부디 예민한 사람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교 가는 길> 그리고 <너에게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